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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평양 도착

2016.02.29 16:18

aesan 조회 수:760

평양 도착

그날 밤을 차내(車內)에서 지내고 그 이튿날 오후 8시 평양역(平壤驛)에 도착(到着)하였다. 여관안내자(案內者)를 따라 역전(驛前)에 있는 조선(朝鮮)여관에 들었다. 점화(點火)도 하지 않은 차디찬 방()이다. 점화(點火)를 청하여도 들은 둥 마는 둥 한다. 우리 부처(夫妻)와 황()장로는 한 방()에 들었다. 조금 후에 주인 신해령(申海寧)씨는 우리의 공민증(公民證)을 청하여 주었더니 목사가 오시는데 하고 나아와 인사(人事)하며 자기는 장로교(長老敎) 장로라고 한다. 먼저 온 한국보(韓國補) 목사가 있는 역전교회(驛前敎會)를 물으니 모른다고 하여 찾지 못하였다. 그 날 밤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청진교회(淸津敎會)를 생각하니 마치 어린아이를 떼어놓고 온 어미같이 궁겁다 못하여 섭섭하여 무엇을 잃은 것같이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다시 업디여 기도하고 누웠다 일어났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내였다.

 

그 이튿날 8일은 곧 주일(主日)이다. 주인은 가까운 자기 예배당으로 가자하나 거절(拒絶)하고 남산현 예배당으로 갔다. 이 교회는 우리 감리교회(監理敎會) 중 제일(第一) 큰 건물이고 근 천명(千名) 교우가 예배하던 교회이다. 황치헌(黃致憲)이가 이 교회 담임(擔任)으로 있을 때 일본(日本)에다가 아첨하려고 예배당 종()을 떼어 일본(日本)에 헌납(獻納)함으로 이것이 효시(嚆矢)가 되어 각 교회가 따라 종()을 아니 바칠 수 없이 바치었다. 천벌(天罰)인지 몰라도 이 교회에 우연(偶然) 실화(失火)하여 큰 건물이 전부 소실(燒失)되고 재만 남았다. 그리고 정감독(鄭監督) 시대(時代)에 수천평(數千坪) 교회 당지(堂地)까지 매각(賣却)하여 버렸다. 하늘이 어찌 무심(無心)하리요.

 

전에 없는 사변(事變)(해방)이 일어나 일적(日賊)들이 다 쫓겨 가게 됨에 교우들이 다시 일어나 불탄 재를 쓸어버리고 예배당을 건축(建築)하게 되었으니 감사의 눈물을 금()할 수 없다. 담임목사(擔任牧師) 송정근(宋貞根)씨의 노력도 크거니와 합심(合心)된 교우의 열성(熱誠)이야 더욱 감사하다. 건축비(建築費)200만원이라 하니 진실로 큰 돈이다. 나는 사변(事變) 전에 청진교회(淸津敎會) 건물 육십(六十坪)을 사느라 1만원을 거두기에도 사력(死力)을 다하였는데 200만원이라는 숫자를 들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송목사(宋牧師)는 북중연회(北中年會)의 회장(會長)으로 오는 624-27일까지 연회(年會)로 모인다고 하며 나더러 너무 일찍 오시지 않았소 한다. 나는 이번 연회(年會) 출석(出席)보다 이 기회에 남행(南行)을 목적한다고 대략(大略) 설명하고 같이 예배를 보았다. 예배를 드릴 때에 나는 눈물의 기도를 올리었다. 사변(事變) 후에 감리교회(監理敎會)의 경영(經營)인 광성중학교(光成小中學校)와 정의여중학교(正義女中學校)와 요한성경학교(聖經學校)와 지홀 병원(病院) 등은 전부 공산당(共産黨)에게 몰수(沒收)를 당()하고 모두 적기(赤旗)가 꽂였다. 이런 무리(無理)가 어디에 있을까. 나는 통곡(痛哭)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抑止)로 참았다.

 

나는 예배 후에 황장로(黃長老)와 같이 련광정과 목단봉(牧丹峯)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어느 음식점(飮食店)에 들어가니 청년 일인(一人)이 와서 추우냐고 묻는다. 저는 박삼열(朴三悅)입니다. 배재(培材)를 나와 치과(齒科)를 공부(工夫)하고 이곳 와서 치의업(齒醫業)을 경영(經營)합니다. 좀 오십시요. 어릴 때에 작난(作亂) 잘하던 박삼열(朴三悅)이 저렇게 신사(紳士)가 되었으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없다 답()하고 돌아왔다. 그 시()로 황장로(黃長老)는 역()에 도착(到着)된 행리(行李) 두개를 찾아 도로 맡기고 명일(明日)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