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LOGIN

회원로그인

ID/PW 찾기회원가입

Favorite

49. 전별회와 청진역

2016.02.29 16:17

aesan 조회 수:756

전별회

하루는 처()의 전()하는 말에 교회에서 전별회(餞別會) 형식(形式)을 만들고 나를 청하려고 한다고 나는 준거(峻拒)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나의 거취(去就)는 당국(當局)이 주시(注視) 중인 고로 그런 회합(會合)이 있으면 자연 소문(所聞)이 나고 나의 거취(去就)가 더욱 곤()치 않은가. 나를 주목(注目)하고 살피는 것은 보안서(保安署)뿐 아니라 사령부(司令部)까지 엄중(嚴重)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떠날 마음이 간절하다. 왜냐하면 도저(到底)히 이곳에서 전도(傳道)할 수 없고 내가 있음으로 도리어 교회에 방해(妨害)가 되지 않을까 함이다.

 

며칠 후에 한길연(韓吉淵) 속장(屬長) 집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역시 간청(懇請)이 심한 고로 아니 갈 수가 없다. 하루는 속장부인(屬長夫人)들이 한속장(韓屬長) 집으로 모여 음식(飮食)을 만드는지라.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 제직(諸職)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떡을 만들어 같이하고 유목사(劉牧師)의 설명에 오늘 저녁은 사은회(謝恩會)로 모였다 선언(宣言)하고 나에게 사례금(謝禮金) 만원을 주어서 받았다. 나는 눈에 눈물을 금치 못하고 여러 직원(職員)들도 모두 명인(鳴咽)하여 마지않는다. 전별(餞別)을 짐작함이라. 여러분 안심 하시요. 나는 이번 떠나 평양(平壤)에 가서 연회(年會)에 참석(參席)하고 형편(形便)을 보아서 도로 올런지 모르니 이 자리를 전별(餞別)하는 자리로 알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그렇게 듣지 않고 나 역시 양심(良心)에 없는 말이다. 부끄럽다.

 

청진역과 회고

() 66일이다. 이날 오후 2시 떠나기로 예정(豫定)하였는데 김길남(金吉南), 황종우(黃鍾宇) 두분 장로는 서로 의논하고 이 험()한 길에 80노인(老人)을 어찌 아무 보호(保護) 없이 보내리요. 황종우(黃鍾宇) 장로가 동행(同行)하기로 결정하고 여비(旅費)로 두 장로가 자담(自擔)하는 모양이다. 우리 여비(旅費)중 같이 써도 무방(無妨)한데 시간 곧 회왕(回往)하는 것을 다 생각하지 않고 이 노물(老物)을 보호(保護)하여 줌은 참 잊을 수 없는 사랑이다.

 

행리(行李) 두개는 평양(平壤)으로 부송(付送)하고 기차표(汽車票)도 평양(平壤)까지 샀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떠나려던 것이 모두 미리 눈치 채고 나온 사람 수십명이 역두(驛頭)에 열립(列立)하여 눈물을 흘리며 명인(鳴咽)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다. 나도 부지중(不知中)에 금()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진다. 그리하여 정면(正面)으로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을 씻었다. 황장로(黃長老)는 관북대학(關北大學) 공무증(公務證)을 가지고 먼저 차에 올라 자리를 정()하여 놓았다. 차는 기적(汽笛)을 울리며 정각(正刻)에 떠났다. 전에 소련군이 기차(汽車)를 주장(主張)할 때는 시간도 없고, 정원(定員)도 없고 퍽 곤란하던 것이 차가 우리 조선인(朝鮮人)에게 넘어 온 후로는 이렇게 규칙(規則) 있게 시간을 지킨다. 또 급행차(急行車)라 작은 정거장(停車場)에는 정차(停車)하지 않고 직주(直走)한다.

 

청진(淸津) 정거장(停車場)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왔으나 자꾸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금할 수 없다. 19406월에 우리 부처(夫妻)는 청진(淸津)에 와서 만(滿) 7년 만에 떠나는 나의 회포(懷抱)는 매우 비감(悲感)하다. 미운 정() 고운 정() 더 사랑을 서로 주고받고 하던 형제자매(兄弟姊妹) 또 많은 풍파(風波)와 많은 고통(苦痛) 중에 같이 참여(參與)한 여러 형제자매(兄弟姊妹)들을 생각할 때 참 잊을 수 없는 사랑이다. 나는 평소에 교회일로 인하여 소소(小小) 숙원(宿怨)이 있던 형제(兄弟)가 있었는데 다 화해(和解)하고 흔적(痕迹)이 없게 되었고 다시 맺어진 사랑이 더욱 깊어졌다. 이런 것 좇아 생각하며 돌아서는 나의 마음이 더욱 섭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