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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김대일 장로의 내방

2016.02.29 16:13

aesan 조회 수:838

김대일 장로의 내방

생기령교회(生氣嶺敎會) 김대일(金大一) 장로가 동부인(同夫人)하고 내방(來訪)하였다. 처음 수인사 후에 하는 말이 나는 생기령(生氣嶺)에 와 전도(傳道)하던 중 생활비(生活費) 부족으로 살 수가 없어 생활방법을 문의(問議)하러 왔다 하며 하루에 콩물 한 그릇씩 먹고 살 수 없으니 무슨 도리를 지시(指示)하여 달라는 것이다. 나는 듣기 심히 거북하였다. 동정심(同情心)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어이할 도리가 없다.

 

우리 연합구역회(聯合區域會)에서 김장로(金長老)님을 모시게 된 이유는 생활비(生活費) 담당(擔當)하고 전도인(傳道人)으로 정()한 것이 아니고 생기령(生氣嶺)에 기왕 예배 보던 곳에 예배 인도자(引導者)가 없으니 누구든 자기 생활하는 이가 전도(傳道)할 마음 있으면 그 곳에 가서 예배보고 예배까지 인도하여 달라는 것이고 그런 유지(有志)에게 부족하나마 생활비(生活費)는 아니고 보조(補助)로 일천원을 드리겠다 함이오 생활 보장(保障)한 것이 아니올시다. 담보(擔保)하려고 하여도 힘이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우시면 전도(傳道)를 그만두시고 다른 영업(營業)을 하시든지 하십시오.

 

영업(營業)도 할 수 없고 불가불(不可不) 고향(故鄕)인 황해도(黃海道)로 가야겠으니 여비(旅費)로 삼천원만 달라 한다. 그것도 내가 돈이 있으면 드리겠지만 불가불(不可不) 유사부(有司部)에 말하여야겠는데 김장로(金長老)가 우리 교회에 공로자(功勞者)도 아니고 연구자(年久者)도 아니거늘 교회를 버리고 가는 이에게 여비(旅費) 삼천원 청구(請求)하면 들을까 싶지 않습니다. 내 생활이 장집사(張執事)의 집에 붙어사는 형편(形便)에 김장로(金長老) 내외분(內外分) 접대(接待)할 일이 망연(茫然)하다.

 

죽이나 밥이나 우리 먹는 대로 그날 저녁을 같이 먹고 숙소(宿所)는 불가불(不可不) 목사 주택 웃방에서 자게하고 아침은 유목사(劉牧師) ()에서 대접하게 하였다. 가지 않고 오는 주일(主日)까지 보고 가겠다 하여 나흘 동안이나 대접할 도리가 없다. 새로 온 목사가 담당(擔當)할 수도 없고 또한 나도 감당(堪當)할 수가 없는 고로 교우 집에 돌아다니며 한 끼니씩 부탁하였다.

 

월요일(月曜日) 아침에는 어느 여관업(旅館業)을 하는 자매(姊妹)의 집에 부탁(付託)하였더니 여관의 밥그릇이 자연 적은지라. 김장로(金長老) 부처(夫妻)가 아침을 얻어 잡수시고 목사관(牧師館)에 와서 노기등등(怒氣騰騰)하여 하는 말이 나를 거지 대접을 하느냐고 하며 유목사(劉牧師)는 쌀밥을 먹지 말고 나를 좀 도와 달라 하여 얼굴을 붉히면서 갔다고 하여튼 인격(人格)부족한 사람으로 이 개척전도(開拓傳道)라는 이름을 빙자(憑藉)하여 생활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려는 뜻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때 쓰려는 것같이 보인다.

 

나는 그 이튿날 생기령교회(生氣嶺敎會)를 관할(管轄)하는 김득수(金得洙) 목사에게 편지하고 그의 진퇴(進退)를 좀 지휘(指揮)하라고 부탁(付託)하였다. 김목사(金牧師)는 매월 나뭇값으로 일천원 내외(內外)로 받으시고 친()히 산에 가서 채신하여 지내며 조금도 부족을 말하지 않으니 그의 인내(忍耐)와 충성(忠誠)은 고대(古代) 어느 선지(先知)도 부끄럽지 않다. 김장로(金長老)는 김목사(金牧師)를 배웠으면 하고 탄식(歎息)하였다.

 

청진교회(淸津敎會)는 유목사(劉牧師)에게 위임(委任)하여 그의 노련(老鍊)한 방법으로 잘 인도하니 감사하다. 나는 5월 첫 주일(主日)에 어항교회(漁港敎會)에 가서 예배하고 또 성찬식(聖餐式)을 행()하였다. 그날 모인 교인이 불과(不過) 이십 여명인데 주일헌금(主日獻金)이 이백십원이고 특별헌금(特別獻金)이 일천이백원이다. 나는 한목사(韓牧師) 대신 예배 인도할 대무자(代務者)를 정()할 터인데 누가 적임자(適任者)이냐고 물으니 모두 최동준(崔東俊) 장로를 원()하여 가결(可決)되였다. 그러면 최장로(崔長老)가 유()하실 방()을 예비(豫備)하여 놓고 다시 기별하라 부탁(付託)하고 돌아오다.

 

자기 집에 와서 유()하라는 것이다. 여러번 청하는 것을 응()하지 않았더니 우리 처()를 보고 장로의 체면(體面)을 보고라도 오시라는 것이다.(16:15) 나의 응()하지 않는 이유는 그 부인(夫人) 박복녀(朴福女) 속장(屬長)이 자녀(子女) 7남매(男妹)를 데리고 고생하는데 우리 부처(夫妻)까지 또 가서 한 집에서 법석대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생각하고 응()치 않았더니 장로 내외분(內外分)이 그렇게 지성(至誠)스럽게 구니 목석(木石)이 아닌 나로서 피동(被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로 이주(移住)하느냐 묻는 이가 많다. 나의 온상(溫床)은 청진(淸津)인데 요사이 일이 좀 적으니 우리 감리교(監理敎) 구역(區域)인 원산(元山)도 가보고 평양(平壤)도 가보려고 한다. 나에게 이런 자유가 있으니 나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담임자(擔任者) 없이 곤란한 교회가 있다면 미력(微力)이나마 도와주려고 까지 생각한다. 오는 624일에 평양(平壤)에서 북중연회(北中年會)가 모인다고 통지(通知)가 왔으니 이 기회가 가장 적당한 좋은 기회라고 답()하였다.

 

오래간만에 이진순(李眞淳) 선생(先生)이 내방(來訪)하였다. 그간 사령부(司令部)에 호출(呼出)이 있어 세번이나 갔다고 사상(思想) 여하(如何)를 묻기에 자기 마음에 있는 대로 변명(辨明)하였다고 주의인물(注意人物)을 들어 회답(回答)이 되었는데 이정심(李淨心), 강석록(姜錫祿) 등을 의심(疑心)하지 말라 부탁(付託)하고 김진호(金鎭浩) 목사는 무슨 까닭으로 검거(檢擧)하여 고생을 시켰느냐고 질문(質問)하였고 그런 지식층(知識層)을 주목(注目)하여 배척(排斥)하고 목불식정(目不識丁)하는 무식자(無識者)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민중(民衆)을 인도하니 이 민족(民族)은 문명(文明)을 맛보기 전에 먼저 흙탕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質問)을 하여 동의(同意)를 얻었다고 나는 이 말 듣고 침묵(沈黙)을 지켰다. 나는 이 세상에 아습자(啞襲者)이 되어 일체(一切) 자황(雌黃)을 말하지 않으려고 혀를 물었다.

 

나의 쓴 빙어(氷語)라는 시집(詩集)이 있는데 작년(昨年) 5월 까지 우수마발(牛溲馬勃)을 기()한 것이 있고 그 후로 절필(絶筆)하였다. 이것도 자황(雌黃)이 될까 함이다. 복수(復讎)는 불가(不可)하거든 하물며 구설(口舌)로 드러나게 쓸데없이 물의(物議)를 초래(招來)할 필요(必要)가 없다.

 

()목사가 부임(赴任)한 후에 내가 떠날 것을 교우들이 미리 눈치 채고 있는 것 같다. 임시로 장집사(張執事)의 집에 있으나 김장로(金長老)는 자기집 인외동(仁外洞)으로 오라고 하지만 그 부인(夫人)의 고생을 생각하고 하루 밤 가서 쉬고 곧 돌아왔다. 인외동(仁外洞)에 사는 학생 장동신(張東信)군이 자기의 부모(父母) 양해(諒解)를 얻어 그 집에서 속회(屬會)로 모이게 되어 매() 화요일(火曜日) 하오(下午) 일곱시에 개회(開會)하는데 회원(會員)이 한() 이십명 가량 모이고 재미가 많은지라. 하루 밤 속회(屬會) 인도로 갔다가 김장로(金長老)댁에서 유숙(留宿)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