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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진승준 속장과 숙자의 고생

2015.10.12 10:16

aesan 조회 수:1001

5. 여러 사람의 고생담


진승준 속장과 숙자의 고생


하루는 처(妻)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던 끝에 처(妻)는 자기의 간증(看證)을 들으면 한다. 나는 처(妻)의 고생을 생각하고 종종(種種) 동정(同情)의 눈물을 흘렸다. 또 무슨 고생의 말인가 설명하기를 청하였다. 가장 풍파(風波)의 곡절(曲折)이 많은 청진(淸津敎會)는 영원(永遠)히 잊을 수 없고 동시(同時)에 진승준(陳承濬) 속장(屬長)의 사랑은 더욱 감사하다 하며 우리가 도수장(屠獸場)에 있을 때 식수(食水)가 없어 거진 삼리(三里)밖에 있는 물을 길어 오신다. 그 때에 진(陳)씨는 하루에 한번씩 빠지지 않고 물을 길어주던 그 사랑과 그 후 교회의 분란시(紛亂時)에도 그는 절대(絶對) 목사를 옹호(擁護)하였다고 한다.


진(陳)씨는 본래(本來) 해주(海州) 출생(出生)으로 박성녀(朴姓女) 속장(屬長)과 같이 청진(淸津)에 와서 전도(傳道)하던 중 진(陳)씨는 수중(手中)에 분전(分錢)이 없고 박(朴)씨는 근 천원을 소지(所持)하였다. 한 곳에서 온 것만큼 의례히 동정(同情)이 있으리라 하고 돈 2원만 꾸어 달라 하였더니 박(朴)씨는 거절한다.


며칠 동안 굶어가며 먹는 둥 마는 둥 살다가 마침 안흥석(安興錫)씨의 보조로 돈 2원을 꾸어가지고 길가에 물건을 버려놓고 장사를 시작하여 안(安)의 돈 2원을 갚고도 남음이 있어 밥을 지여먹고 지내는 중 그때 처음으로 처(妻)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한다. 처(妻)는 그 때부터 진부인(陳夫人)과 정의(情誼)를 통(通)하여 고락(苦樂)을 같이 하게 되었다.


우리가 청진(淸津)에 있는 동안 진부인(陳夫人)의 도움이 많았고 그 후 경성(鏡城)에 가서 있을 때 진부인(陳夫人)은 주을교회(朱乙敎會)의 전도부인(傳道夫人)으로 있으며 전도(傳道)에 많은 협조(協助)가 있었고 우리가 어항(漁港)에 와서 있을 때는 진부인(陳夫人)도 어항(漁港)으로 와서 같이 있었다. 그 때 우리의 생활은 말도 못되게 빈약(貧弱)하여 매삭(每朔) 십오원을 가지고 생활할 때라. 어떻게 산 것을 목사는 전연(全然) 몰랐다. 그러나 처(妻)는 진부인(陳夫人)과 같이 행상(行商)하며 외(外)로는 전도(傳道)한다 칭(稱)하고 목사에게 알리지 않고 잠상행위(潛商行爲)를 하여 깩기저고리를 만들어 팔기와 비루 같은 것도 팔았고 또 진부인(陳夫人)은 만주(滿洲)를 다니며 장사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단독(單獨)으로 행상(行商) 겸(兼) 전도(傳道)하여 우리 생활을 도와주었다고 하여 참으로 진부인(陳夫人)의 신세(身勢)는 잊을 수 없다고 말마다 오인(嗚咽)을 금(禁)치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청진(淸津)으로 반이(搬移)한 후에는 진부인(陳夫人)은 어항(漁港)에 유하여 전도(傳道)하며 종종 청진(淸津)에 오셔서 교우 심방(尋訪)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사변(事變)을 만나 교우들은 다 이산(離散)하여도 진부인(陳夫人)만은 홀로 교회를 지키고 있으며 포탄(砲彈)이 비쏟아지듯이 퍼붓는 그 틈에도 업디어 기도하며 특히 우리가 살아서 만나기를 기도하였다. 그 기도대로 다행히 만나게 되니 어찌 감사한지 눈물이 쏟아졌다고 처(妻)는 말마다 눈물 섞인 말이다.


그리고 작년(昨年) 10월에 진부인(陳夫人)은 해주(海州)에 있는 그 딸 김성일(金成一)의 혼사(婚事)의 기별을 듣고 떠나가며 혼사(婚事) 후에는 다시 오겠다 하였으나 발행(發行)한 후 소식(消息)이 없어 궁거웠다. 박성녀(朴姓女) 속장(屬長)의 편(便)에 안부(安否)를 들었으나 중간(中間)에 로검(路檢)이 심하여 오기 어려우리라고 예언(預言)한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苦待) 중이다. 어항교회(漁港敎會)에서는 하루가 삼추(三秋)같이 기다린다.


진부인(陳夫人) 대리로 최소선(崔小仙), 나(羅)씨가 심방(尋訪) 전도(傳道)한다. 나는 처(妻)에게 무슨 말로 위로(慰勞)할까. 소생도 없으니 나 떠난 후에 매우 고적(孤寂)할 것을 예비(豫備)하여 항상 믿음의 말로 위로(慰勞)하였다. “연로(年老)한 남편(男便)보다 주가 계시며, 자식(子息)보다 여러 교우가 있지 않느냐.” 같이 업디여 기도하였다. 천리(千里)타향(他鄕)에 있으니 멀리 있는 자식 손자들을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였다.


자매(姊妹) 백채순(白采順)씨가 그 고향(故鄕)인 길주(吉州)로 반이(搬移)하였다. 그 남편(男便) 허운(許雲)은 길주(吉州)의 대성(大姓)이다. 그 이거(移居)한 동명(洞名)을 물으니 탑양동(塔陽洞)이라 한다. 몇 호(戶)나 되는가 물어보니 근 200호(戶) 가량이라고. 그러면 그 곳에 교회를 설립(設立)하고 전도(傳道)하여 보시오. 허군(許君)은 아직 신앙(信仰)이 없는지 그런 의사(意思)가 없다. 하여튼 길주(吉州)는 나의 선조(先祖) 길주공(吉州公)의 유가(遺家)가 있는 곳이라 교회가 있으면 겸(兼)하여 유가(遺家)를 찾아 볼겸 한번 가고 싶었다.


이번 사변(事變) 때에 길주(吉州)가 가장 많이 참화(慘禍)를 입었다. 일(日)사람들이 소련비행기(蘇聯飛行機)가 통과(通過)할 때 공연(公然) 사격(射擊)을 시(試)한 고로 소련비행기(蘇聯飛行機)는 모일(某日) 폭격(爆擊)할 터이니 조선인(朝鮮人)은 미리 피(避)하라고 예고(豫告)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것을 알고 그날 일부러 쌀 배급(配給)을 준다고 광고(廣告)함에 오랫동안 굶주린 백성들은 죽음을 모르고 쌀을 가질려 군가이 모였다가 소련비행기(蘇聯飛行機)가 사정(事情)없이 옥석(玉石)을 분별(分別)치 못하고 폭격(爆擊)을 시(試)하여 일본인들은 전부 도피(逃避)하였고 조선인(朝鮮人)만 다수(多數) 사상(死傷)이 되었다. 이런 흉계(凶計)를 꾸민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