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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석방

2015.10.08 11:59

aesan 조회 수:563

며칠 후 인외동(仁外洞)에 사는 장병철(張炳哲)이라는 청년이 들어왔다. 학생 최영수(崔泳洙)와 장동식(張東植) 양군(兩君)을 위하여 후원(後援)하다가 잘못되어 피검(被檢)되었다 하며 미구(未久)에 다 석방(釋放) 되리라고 믿습니다 하매 어떤 이는 오는 8.15기념(記念)에는 꼭 석방(釋放)되리라 한다. 그러나 나는 다 믿지 않는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놓일 것이고 허락지 않으시면 석방(釋放)되지 못할 것을 믿는다.


장군(張君)의 말을 들으니 학생의 집에서 부소(不少)한 금전(金錢)을 내여 당국(當局)을 향응(饗應)하였으나 석방(釋放)의 희망(希望)이 없는 고로 학생의 가정(家庭)에서 문제(問題)를 일으켰다 하며 그 사이에서 장군(張君)의 소개(紹介)가 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도리어 지원하다고 감정(感情)의 말을 한다. 법이 향응(饗應)이나 뇌물(賂物)로 인하여 굽히면 법(法)이 아니라 답(答)하였다.

 

어느날 석식(夕食) 후에 또 실외(室外)로 호출(呼出)되여 사무실(事務室) 앞에 앉으니 아마도 법관(法官)인 듯한 점잔한 이가 묻기를 “무슨 일로 들어 왔으며 들어 온지 며칠이 되었는가?” 묻는다. “오월(五月)에 들어왔고 죄명(罪名)은 모르고 다만 김구(金九), 이승만(李承晩) 타도(打倒)가 불가(不可)란 한 말밖에 다른 일이 없다.” 답(答)하니 “타도(打倒)가 불가(不可)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기에 사령부(司令部)에서 진술(陳述)함 같이 진술(陳述)하였다.


자기도 종교(宗敎)를 이해(理解)한다고 하여 종교(宗敎)와 정치(政治)가 다르니 모든 일을 일률(一律)로 종교(宗敎)로만 해석(解釋)할 수 없다하여 사령부(司令部)에 관계(關係)는 자기가 임의(任意)로 할 수 없다 하고 매우 동정(同情)하는 표(表)를 보인다. 그가 먼저 기석(起席)하여 간 후에 간수(看守)에게 물으니 도사법부(道司法府) 검사(檢事)라 한다.


이튿날 아침 식후(食後)에 소병(蘇兵) 일명(一名)이 와서 나오라 한다. 또 호출(呼出)되였는가 하고 나오니 맡긴 물품(物品)을 찾으라고 하여 일일히 찾아가지고 소병(蘇兵)을 따라 타처(他處)로 이동(移動)시키나 보다 하고 나서니 소병(蘇兵) 말이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 “가까운 화원동(花園洞)이라.” 하니 “같이 가자.” 한다. 이불을 뭉쳐 안고 집으로 왔다. 최라길(崔羅吉)씨, 신광현(愼光顯) 목사, 최주태(崔柱泰)씨도 뒤미쳐 와서 위로(慰勞)한다. 나도 생각지 않은 일이고 모두들 의외(意外)라 하며 영광(榮光)을 주께 올리였다. 아-멘


이날은 장기구류(長期拘留) 51일인 곧 7월 21일이다. 그간에 가처(家處)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교우들의 눈물겨운 기도는 참으로 잊을 수 없이 감사하다. 뿐만 아니라 그간 교회를 대리(代理)하여 주신 신광현(愼光顯)목사에게 특히 감사하며 ‘백인(伯仁)의 화(禍)는 유아(由我)라.’는 말과 같이 신창균(申昌均)장로의 무리(無理)한 고초(苦楚)는 무슨 말로 사과(謝過)할지 불안(不安)은 말할 수 없다.


이층(二層) 접실(=다다미방)에 자리를 정(定)하고 고요히 누웠으니 흔들리는 배와 같이 정신이 희황하여 요요 부정(不定)이다. 신목사(愼牧師)에게 수고하시는 중 더 수고하여 달라고 부탁(付託)하고 장희석(張喜錫) 집사(執事)의 집 이 층에 자리를 정(定)하고 옮기였다. 객번(客煩)을 좀 피(避)하려 함이다. 장군(張君)의 부처(夫妻)가 이 노물(老物)을 친부모(親父母)와 같이 영접(迎接)하여 자연히 끌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