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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다시 예배시작

2015.10.08 11:31

aesan 조회 수:539

* 다시 예배시작


구월(九月) 첫 주일부터 예배를 시작(始作)하였는데 한(限) 이십여명(二十餘名)이 모이고 그 다음 주일(主日)엔 한(限) 삼십여명(三十餘名) 출석(出席)하였다. 예배 후에는 서로 손을 붙들고 울며 살아서 만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여 우는 이가 많다.


나는 시청(市廳)에 가서 위원장(委員長) 최중훈(崔重勳)씨를 보고 “정부(政府)에서 종교(宗敎)에 대(對)한 방침(方針)이 어찌 되었느냐.” 물으니 “신앙(信仰)은 절대(絶對)자유고 간섭(干涉)지 않으려는 방침(方針)이나 이 북조선(北朝鮮)에서 한(限)하여 단 기독교(基督敎), 불교(佛敎), 천도교(天道敎) 세 종파(宗派)만 허락(許諾)하고 기타(其他) 미신(迷信)에 속(屬)한 유사(類似)종교(宗敎)는 소제(掃除)하겠다.” 한다. 우리 기독교(基督敎)가 일구(日仇)들의 손 밑에 갖은 고생을 겪고 갖은 압박(壓迫)을 받아 온지라. 이제 소련군(蘇聯軍)이 상륙(上陸)한 후에 어찌 될까하고 모두들 염려를 마지 않타가 이 소식(消息)을 듣고 모두들 기뻐하며 주일 조예배(朝禮拜)는 보지 못하고 석예배(夕禮拜)만 보던 장로교(長老敎)에서는 조석예배(朝夕禮拜)를 마음 놓고 보게되고, 성결교(聖潔敎)는 해산선고(解散宣告)를 발포(發布) 한 후에 예배를 보지 못하다가 다시 부흥예배로 모이고 외면(外面)으로 보면 종교(宗敎)가 다시 색채(色彩)를 발휘(發揮)할 수 있는 듯하다.


* 외면만 기독교 허락


그러나 내용인즉 기독교인(基督敎人)된 사람을 일반공직(一般公職)에 허(許)치 않고 심지어(甚至於) 교육(敎育)에도 거절이 있고 정치학교(政治學校)에서는 교인은 재학(在學)의 불필요(不必要)를 말하여 퇴학(退學)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甚至於) 교인의 가정(家庭)에도 부부간(夫婦間)에 충돌(衝突)이 생(生)하여 남자가 공직(公職)에 있는 사람은 그 처(妻)의 교회출석(出席)을 금(禁)하는 등이 있다.


각처(各處)의 소문(所聞)을 종합(綜合)하여 들으면 어디는 당국(當局)에 노동봉사(勞動奉事)를 다 오라는데 나오지 않았다 하여 담임자(擔任者)를 구금(拘禁)하였고 어느 곳에는 모든 광고문(廣告文)을 교회의 벽상(壁上)에 난부(亂付)하는 것과 교역자(敎役者)의 여행(旅行)을 감시(監視)하는 등이 있었고 또 대회석상(大會席上)에서 기독교(基督敎)는 신사참배(神社參拜)한 단체(團體)라 친일분자(親日分子)로 취급(取扱)하자고 발언(發言)한 일도 있었다. 그런 고로 교인들의 믿음이 점점 식어지고 교회 출석(出席)이 태반(太半)이나 줄어졌다. 나는 이를 위하여 밤낮으로 기도하였다.


김득수목사(金得洙牧師)는 경성(鏡城)에 있는 그의 사위 최창범(崔昌範) 가(家) 사설(私設) 교회에 가서 일주간(一週間) 집회(集會)를 인도하고 세례(洗禮)도 주고 돌아오는 길에 회령보안서(會寧保安署)에서 심문(審問)을 당(當)하였다. 행구(行具)를 일일 검시(檢視)하여 보고 성경(聖經)을 보고 이것이 무슨 책(冊)인가고 물으며 무엇 하러 다니는 사람이냐고 몇 시간이나 심문(審問)을 당(當)하고 나왔다.


* 핍박 중에도 세례식


1945년은 고난(苦難)가운데서도 주의 은혜가 풍성(豊盛)해서 금년(今年) 성탄(聖誕) 시(時)에 경성(鏡城)에서 남녀(男女) 5인(五人)에게 세례(洗禮)를 주고 청진(淸津)에서도 남녀(男女) 6인(六人)에게 세례(洗禮) 주고 어항(漁港)에서는 몇 사람의 학습인(學習人)이 있었다. 이런 핍박(逼迫) 중에도 오히려 세례교인(洗禮敎人)이 있게 된 것을 감사하여 오는 해는 모든 모순(矛盾) 모든 구속(拘束)이 다 없어지고 자유로운 전도(傳道), 자유로운 신앙(信仰)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였다. 나는 이 사회(社會)에서 나의 존재(存在)를 그렇게 분명히 하려고 하지 않고 남이 알지 못하여도 관계(關係)치 않고 주님의 사업(事業)만 잘되면 하고 기도할 뿐이다. 1946년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