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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반죽동의 밤

2013.12.05 21:06

aesan 조회 수:1003

* 반죽동의 야(夜)


거의 해가 다 지고 저물어 갈 무렵에 소위(所謂) 반죽동(班竹洞)이라는 동리(洞里)에 이르니 이 동리(洞里)사람들은 다 피난(避難)가고 다 빈 집뿐이다. 우리가 이곳이 피난(避難)할 곳이라고 온 것이 참 어리석다. 총소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탕탕하는 소리가 산을 울린다. 우리는 어둠의 길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산골짜기를 올라가노라니


별안간 산중(山中)턱에서 수백명(數百名)의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은고로 짐작으로 우리와 같은 피난민(避難民)인가 하였더니 그 사람들은 다 감옥(監獄)에 갇혔던 죄수(罪囚) 들이었다. 죄수복(罪囚服)을 입은 채 간수배(看守輩)들이 데리고 오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가엾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유쾌(愉快)하기도 하다.


김집사(執事)는 집을 구하노라고 사방(四方)으로 돌아다니다가 거진 시간반(時間半)이나 지난 후에 그 동리(洞里) 최병석(崔秉錫)이라는 사람의 집에 들게 되여 아픈 다리를 끌고 그 집에 들어가 쉬였다. 석반(夕飯)을 만들어 먹는 둥 마는 둥 지난 후에 그날 밤에도 총(銃)소리가 쉬지 않고 그 집 창(窓)밑에 탄환(彈丸)이 떨어지는 듯하다.


혹은 말하되 서소라(西小羅)에 상륙(上陸)한 홍군(紅軍)들이 이 반죽동(班竹洞) 고개를 넘어 온다고 하며 그러면 이 동리(洞里)가 가장 위험(危險)지대(地帶)라고 한다. 내 생각에 홍군(紅軍)들은 일병(日兵)을 쫓아다니는 고로 이 골짜기에는 일병(日兵)이 없으니 홍군(紅軍)이 올리가 만무하다고 주장(主張)하였다.


구름 속에 달빛이 비치나 어둠 컴컴할 뿐이다. 그제야 동리(洞里)에 피난(避難) 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니 아마도 일병(日兵)이 세(勢)가 약(弱)하여 패(敗)하고야 말 것이라고 하며 어쩌면 그렇게 힘을 못 쓰고 달아날 뿐인가 하며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세계강병(世界强兵)으로 유명(有名)한 군대(軍隊)가 그렇게 고스란히 빼앗길 리가 없으니 내일(來日)은 반듯이 일대(一大) 격전(激戰)이 있으리라고 한다. 자정(子正)이 지난 후에 비로서 총(銃)소리가 그치고 이따금 들리는 것뿐이요 콩 볶는 듯한 총소리는 없다.


자는 둥 마는 둥 눈을 좀 붙인 후 일어나니 하늘 구름이 가리 우고 이슬비가 내리며 동천(東天)이 훤하다. 정(定)히 급(急)하면 달아나야겠는데 비가 오니 어찌하나 하고 모두들 근심하는 빛이 있다. 날이 밝으매 그 동리(洞里) 사람들이 돼지를 잡는다고 하여 우리도 돼지고기를 좀 사서 지져먹었다.


비가 개이고 구름이 걷히니 시내(市內)의 소식이 궁금했다. 그래서 산상(山上)에 올라가 바라보자고 뜻을 정(定)하고 올라가니 이 산외(山外)에 산이 또 있어 거진 청진(淸津)을 가야 보이겠는 고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산상(山上)마다 홍군(紅軍)이 파수(把守)를 보는데 말도 모르는 홍군(紅軍)을 만나면 적군으로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


거진 오정(午正) 때 그 동리(洞里)에 사는 어느 노파(老婆)가 청진(淸津)서 오는 길에 어리고개(하인외동고개)를 넘어오는데 거기에서 파수(把守)를 보는 홍군(紅軍)을 만나 어이 할 일없어 두 손을 들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표시하니 어서 가라고 총을 흔들어 보이는 고로 겨우 살아 왔다하매 시내(市內) 형편(形便)을 물으니 각처(各處)에서 불이 일어나 지금 연소중(燃燒中)이고 우리 예배당을 물으니 모른다 하며 난민(亂民)이 사방(四方)으로 다니며 물품(物品)을 가져가느라고 야단들이라고 한다. 


이날(14일)은 총(銃)소리가 그리 심하지 않고 고요하다가 오후에 다시 포탄(砲彈)이 작렬(炸裂)하는 소리가 사면(四面)에서 들린다. 만일 홍군(紅軍)이 고개를 넘어오든지 청진(淸津)서 들어오든지 하면 우리는 도망할 작정을 하고 기다리는 중 겨우 안심할 것은 홍군(紅軍)이 조선(朝鮮)사람을 죽일리 없고 다만 일병(日兵)만 쏘아 해할 터인데 우리의 모양을 일본인같이 꾸미지 말자 한다.


조선복(朝鮮服)은 조선(朝鮮)사람을 표하는 것이요, 양복(洋服)은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을 분별(分別)할 수 없으니 일행(一行)이 다 양복(洋服)을 벗고 조선복(朝鮮服)을 입으면 하나 어디 구(求)할 수 없으니 할 수 없고 가만히 항복(降伏)하여 피(避)할 것밖에 아무 계획(計劃)이 없다. 다행한 것은 일병(日兵)이 이 골짜구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날이 저물매 소총(小銃)소리는 없고 다만 대포(大砲)뿐 이 산을 움직이고 포탄(砲彈)이 터질 때는 번개 불같이 번쩍하여 어둡던 창문(窓門)이 환하게 비친다. 어두운 밤이라 피할 수도 없고 창(窓)밑에 고요히 업디어 기도할 뿐이다. 주인은 들락 달락 송구해하는 모양으로 심히 불안(不安)하다. 우리도 송구치 않을 수 없다. 우리 짐작에 아마 인곡동(仁谷洞) 산상(山上)과 산하(山下)에서 싸우는 듯하고 총소리가 점점 반죽동(班竹洞) 방면(方面)으로 가까이 오는 것은 일병(日兵)이 패(敗)하여 점점 서북(西北)으로 도망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지대(地帶)에 총소리가 그치면 차차 안정(安定)지대(地帶)가 될 터이니 염려 말고 기도하면서 기다리자 하였다. 그날 밤도 너무 송구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날이 밝음에 일행(一行)은 모두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고 이 지대(地帶)를 버리고 타처(他處)로 가자고 의논이 분분(紛紛)하다. 내 생각에 조금 지나면 이 지대(地帶)가 도로 안정(安定)하고 앞으로 갈수록 점점 더 위험(危險)할 것 같으니 좀 기다리면 어떠하냐고 권하여도 듣지 않고 기어이 떠나는 것이 가(可)타는 의논이 승(勝)하여 배낭에서 내여 놓았던 양미(糧米)를 다시 꾸려 넣고 다소(多少) 행구(行具)구 집어넣고 처(妻)는 이고, 나는 짊어지고 일행(一行)의 뒤를 따라 나섰다.


산중(山中)턱에 올라가니 패병(敗兵)의 일대(一隊)가 뒤쫓아 오며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든다. 내 생각에 이것은 화약(火藥)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셈이다. 소병(蘇兵)이 일병(日兵)을 쫓아오는데 우리가 일병(日兵)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위험(危險)한 일이라 하여 나는 도로 내려가기를 주장(主張)하였더니 처(妻)는 불가(不可) 주장(主張)하고 김 집사(執事)도 동행(同行)을 강요(强要)한다. 나는 할 수 없이 사생(死生)을 같이할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 산등(山嶝)을 기여 올라갔다. 산상(山上)에 올라가서 처(妻)는 짐이 너무 중(重)하여 가져온 양미(糧米) 일이(一二) 두(斗)를 종이에 싸서 노상(路上)에 버렸다. 험악(險惡)한 산길에 비참(悲慘)한 광경(光景)을 종종(種種)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