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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아원과 교회가 분리

2013.12.05 21:00

aesan 조회 수:963

* 자분필사(自分必死)


금년(今年)에(1945년)에 천(賤)한 나이 73세(歲)가 되고 보니 기력(氣力)이 점점 쇠약(衰弱)하여 각 교회 순행(巡行)을 자주 할 수 없고 매월(每月) 일차(一次) 순회(巡廻)한다 할지라도 각 교회에서는 항상(恒常) 부족하게 생각한다. 주을(朱乙)에는 김명수 목사가 담임(擔任)하였으니 염려를 놓았으나 경성(鏡城), 어항(漁港)은 다 나의 직할(直轄)이라 아니 갈 수 없다. 어느 때는 경성(鏡城)에 갔다 청진(淸津)에 돌아오려면 기차(汽車)를 이용(利用)하는데 연착(延着) 혹 운행정지(運行停止)가 되는 때는 불가불(不可不) 도보(徒步)로 태령(太嶺)을 넘어 올 수밖에 타도(他道)가 무(無)하여 다리가 떨리고 현기발작(眩氣發作)할 때가 종종(種種) 있었다.


아이들의 편지를 보니 “아버지께서는 왜 교회만 생각하시고 자손(子孫)들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시면 편히 계실 것을 팔십 노인(八十老人)이 교회담임(擔任)이란 말이 됩니까?”하는 원망(怨望)스런 편지가 자주 온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자식(子息)의 집에 가서 어린 손자(孫子)들을 업어주고 자부(子婦)들 손에 밥을 얻어먹는 이보다 이 추운 지방(地方)에서 전도(傳導)하다가 청진(淸津)에서 쓰러지는 것이 더 유쾌(愉快)한 줄 생각하고 아이들의 편지를 또 거부(拒否)하였다.


재작년(再昨年) 오월경(五月境)에 별안간 토사곽란증(吐瀉癨亂症)이 발(發)하여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하고 자분필사(自分必死)로 죽게 되었다. 남녀(男女)교우들은 밤을 새워가며 울며 기도하고, 종질(從姪) 원영(源永)이가 와서 보고 희영(喜永)에게 급전(急電)을 발(發)하여 덕영(悳永), 희영이 다 내려오고 사질(舍姪) 조영(祚永)이도 왔다. 희영은 내려 올 때에 수의일습(壽衣一襲, 죽을 때 입는 옷)을 가지고 왔다. 아마 최후(最後)를 생각한 모양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왔는지 알지 못하였다가 천행(天幸)으로 다시 깨어나 저들이 온 것을 알게 되고 차차 소생(蘇生)이 되였다. 여러분의 기도한 결과로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신 것을 믿고 감사 기도를 올렸다.


아이들의 말은 “이번은 꼭 올라가시지요.” “하나님이 이런 중병(重病) 중에 살려 주신 것은 이 지방전도(地方傳導)가 아직 맡아 볼 사람이 없으니 끝까지 참으라는 뜻인 듯하니 어찌 뭇 교인들을 버리고 갈 수 있느냐.”고 대답하였다. “후기(後期)를 기다리라” 부탁(付託)하고 또 거절(拒絶)하였다.


* 고아원과 교회가 분리


교회가 안흥석의 사업(事業) 고아원에 붙들려 있어 조금도 자유가 없고 눌려 있던 교회를 꺼집어 내여 독립(獨立)교회 즉 자유로운 교회를 만들려고 할 때에 안의 흉폭한 제재(制裁)와 맹렬(猛烈)한 방지(防止)운동(運動)이 있었으나 나는 조금도 그에게 굴(屈)할 생각이 없었다. 나의 하는 일이 주의 뜻이면 안은 나를 대적(對敵)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대적(對敵)함인즉 나는 조금도 두려울 것 없다. 안은 경찰서(警察署)에 고소(告訴)까지 하여서 나의 존재(存在)를 없이 하려고 하는 중 사랑하는 나의 주님은 끝까지 도와주어 이런 화(禍)를 다 면(免)하게 하였다.


또 이 당시(當時)에는 나의 생활이 매우 곤란하던 때라. 그러나 교회에 받는 봉급(俸給)을 희생(犧牲)치 않으면 이 일을 단행(斷行)할 수 없는 고로 다 불원(不願)하고 일을 단행(斷行)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버리시지 않으시고 매양 먹을 것을 주시며 곤란을 참는 마음을 주시어 다 이기게 하셨다. 이렇게 왕사 일을 추억(追憶)하는 때 눈물이 저절로 흐르며 감사하였다. 안흥석은 후에 고아원(孤兒院)을 버리고 상경(上京)한 후에 관청(官廳)과 사회(社會)에서 그 고아원(孤兒院)을 주장(主張)하게 되였다. 그렇게 기승을 피우고 야단하던 안은 이제 도리어 불신자(不信者)가 되여 음주끽연(飮酒喫煙)을 함부로 한다는 말을 들으니 참 한심(寒心)한 일이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길을 지나다 졸지에 최주경을 만났다. 헤어진지 5-6년이다. 전에도 몇 번 먼 낯으로 보기는 하였으나 보고도 인사(人事)가 없이 지내였다가 오늘은 이렇게 졸지에 상봉(相逢)이 되었다.


나는 최의 손을 굳게 잡고 “최선생 용서하시요 과거(過去)는 다 잊어버리시고 이 사람의 잘못을 다 용서하시오.” 최도 기뻐하며 나를 끌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여 낙산사 밑 산상(山上) 조그마한 집 속으로 들어가서 그 부인(婦人) 장숙경씨도 만나 같이 업디어 기도하고 과거(過去)의 원망(怨望)스러웠던 것을 다 자복(自服)하고 최도 같은 기도를 드려 숙원(宿怨)이 운청운산(雲淸雲散)하여 버렸으니 어찌 감사한지 말로 형언(形言)할 수 없다. 숙경씨는 점심을 준비(準備)하여 대접하므로 잘 먹었다.


나는 “최선생 이제는 우리 교회에 다시 와서 같이 예배하면 어떻겠소.” “나의 원(願)이지만은 그간 서부(西部) 제 2교회에서 예배하는 중 소위(所謂) 직분(職分)이라고 있으니 경솔히 나올 수 없고 또 그 예배당을 지나 감리교회(監理敎會)에 가자니 역시 인격(人格)상의 문제(問題)도 있다.” 한다. 그래서 나는 “최선생 그러면 그냥 그 곳에서 예배하시고 몸은 서로 나뉘어도 마음을 한 곳에 뭉치자”고 부탁(付託)하고 집에 돌아오니 어찌 마음이 가벼운지 날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