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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안흥석의 편지

2013.11.25 16:15

aesan 조회 수:1039

* 안흥석의 편지


그때 안흥석(安興錫)씨는 무슨 뜻으로 그런 것인지 경성교회(鏡城敎會)에 편지하기를 경성교회(鏡城敎會) 전도부인(傳道婦人) 김광호를 내여 보내라고 하였다. 이 일은 김목사가 안흥석(安興錫)을 시켜서 한 것 이라고 터무니없는 말로 선전(宣傳)하였다. 나는 그때 그런 말을 듣지도 못하고 경성(鏡城)을 갔다. 전도부인이 병(病)이 있다하여 갔고 들은 말을 변명(辨明)하려 함이 아니다.


경성역에 내리니 주을교회(朱乙敎會)의 어떤 속장(屬長)부인(夫人)이 나를 보고 김광호씨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라 경성에 가니 과연 김광호씨는 세상을 떠났서 장례(葬禮)를 위하여 김득수 목사를 청하여 와 앉았고, 김태옥 장로도 와 있고, 노춘섭 씨도 있다. 신종악 씨는 덮어 놓고 "안흥석(安興錫)을 시켜 김광호 전도부인을 내어 쫓치라 하였으니 그런 법(法)이 어디 있소." 하고 언성을 높여 불경(不敬)한 말을 퍼붓는다. "신장로 그만두시요 내가 경성(鏡城)서 목사로 있으며 얼마나 잘못하였으면 오늘 신장로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겠오. 덮어 놓고 그만 두시요. 내가 변명할 것이 아니요. 내가 잘못하였소." 하고 말하고는 마루기 속장 집에 가서 밤을 지내고 다시 장례식(葬禮式)를 위하여 모였으니 나는 “장례(葬禮)나 보고 가겠다.” 하고 그 이튿날 밥을 먹으라고 기별이 왔다.


* 안흥석 편지는 하고(何故)


갔더니 장례준비위원들이 전과 같이 둘러 앉었다. 또 신장로는 그 말을 꺼집어내어 전보다 더 불쾌(不快)하게 퍼붓는다. “신장로 그만 두자 하여도 왜 그러시오.”하고 기도를 청하여 엎디여 기도하였다. "이 자식이 목사로 얼마나 죄를 범하였기에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꾸지람을 듣게 하십니까. 이 일에 대하여 잘못이 있으면 용서하여 주옵소서", 노춘섭도 기도하기를 "김목사가 믿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없으니 용서하십시오." 한다. 나는 그 아침에 밥 한술 먹지 못하고 시간이 되여 장지에 올라갔다. 장례위원들이 무슨 까닭인지 장례를 거행하지 않고 목사가 왔으니 내가 행(行)하면 하는 눈치이다. 그리하여 장례식(葬禮式)을 행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아침에 조엘리사벳 아들 모세가 왔다. "지난밤에 김광호 전도부인이 공중에 올라가 외치는 소리가 있어 '김진호와 안흥석이 회개하지 않으면 천벌(天罰)을 받는다'하여 어머니께서 그 말을 전하라 하여 왔습니다." “전해 주시니 잘 들었습니다고 말씀드려라.”하고 보내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기도하여 보아도 경성교회는 미신으로 편한 날이 없으니 한국보(韓國輔)씨 쫓겨 나오고, 나도 지금 어항(漁港)으로 오고, 신종악 장로가 그들 미신을 그냥 이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처리하십시요. 어찌하면 좋을까!


이 자식이 이 지방목사로 있으며 또 청진교회(淸津敎會)가 비어 청진(淸津)에 들어가니 또 안흥석(安興錫)의 고아원(孤兒院)과 예배합동(合同)문제(問題)로 또 요란(搖亂)이 일어났다. 그러니 이 문제를 목사 단독(單獨)으로 결정할 것이 아니요 온 교회의 의사를 물어보아 결정하리라 정하고 어느 주일(主日) 아침예배 후에 고아원(孤兒院)에서 교회를 옮기는 문제의 가부(可否)를 물으니 팔십명(八十名) 중 옮기는데 모두 거수하고 불가(不可)에는 한사람도 없다. 안흥석(安興錫)씨의 말도 생각할 점이 있지만 안흥석(安興錫)의 성질이 너무 고집하여 일반(一般)의 동정이 없어졌다. 할 수 없이 옮기게 되여 그 이튿날 월요(月曜) 아침에 온 교우가 모여 이고 지고 싣고 하여 별안간 옮기였다. 어항(漁港)서 청진(淸津) 올 때와 같이 되였다. 안흥석(安興錫)은 교회에 대(對)한 악감(惡感)이 심하여 언어(言語)로 행동(行動)으로 중상(中傷)을 마지않으며 고아원(孤兒院) 직원(職員)으로 감리교회(監理敎會)에 참석(參席)하는 사람은 곧 축출(逐出)하며, 아원(兒院)들도 교회에 대(對)하여 일절(一切) 금족령(禁足令)을 내렸다.


* 화원정 반이


1944년 7월 31일에 지금 예배드리는 화원동(花園洞) 23번지 가옥(家屋) 2층으로 옮기였다. 남녀교우(男女敎友)들이 교회물품(敎會物品)을 이고 지고 끌고 하여 삽시간에 옮기였으며 매삭(每朔) 월세(月貰)는 40원에 정(定)하였다. 목사주택(牧師住宅)은 2층 접실(다다미방)로 옮기였다. 이번 일에 모험(冒險)하고 같이 협력(協力)하여준 장연옥(張蓮玉) 속장(屬長)의 도의심(道義心)을 감사한다. 예배장소(禮拜場所)도 그의 주선(周旋)이고 월봉(月俸)의 일시지불(一時支拂)도 그의 노력(勞力)이다. 고아원(孤兒院)에 있을 때는 한번도 금봉(金棒)을 받지 못하고 조금도 자유가 없었다.


* 안군 공문을 은익


일일(一日)은 고등계(高等係)에 출두(出頭)하라는 호출(呼出)이 있다. 오전 9시에 갔더니 소위(所謂) 평산(平山)이란 사람이 화난 얼굴로 묻기를 감리교회(監理敎會)를 왜 고아원(孤兒院)과 분리(分離)하여 나왔느냐 하며 그 이유를 상술(詳述)하라고 한다. 신령(神靈)한 사업(事業)은 사회사업(社會事業)과 혼동(混同)할 수 없고 또 복잡(複雜)한 장소(場所)에서 고요한 기도를 드릴 수 없어 나왔다 하였고 그외 안흥석(安興錫)의 단처(短處)는 일절(一切)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안흥석(安興錫)의 무소(誣訴)가 분명하지만 나로서는 차마 안흥석(安興錫)의 허물된 것을 말할 수 없었다.


고아원(孤兒院)에서는 안흥석(安興錫)의 고소(告訴)로 김목사가 잡힌 줄 알고 몇이 와서 위문(慰問)까지 하였다. 이제 후로는 안흥석(安興錫)의 심사(心事)가 음험(陰險)한 것을 철저(徹底)히 알고 이제부터는 멀리할 생각이 났다. 하여튼 교회에 대마(大魔)가 다 나아가고 이제 모이는 사람만은 믿음과 사랑으로 모여 은혜스러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몇해 동안 마수하(魔手下)에 붙잡혔던 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자유롭고 사랑스럽게 자라나기 위하여 교우들은 열심 기도하는 중이다.


그 후에 도(道)고등계(高等係)에서 각 교회 주관자(主管者)와 직원(職員)들을 호출(呼出)하여 강덕도장(康德道場)에서 계연성(禊鍊成)을 시(試)하는데 감리교(監理敎)의 주소(住所)를 몰라 고아원(孤兒園)으로 통지(通知)한 것을 안흥석(安興錫)은 이것을 고의(故意)로 방치하여 두었다. 감리교회(監理敎會) 결석(缺席)으로 경성(鏡城) 신종악(申鍾嶽)씨를 호출(呼出)하였으나 역시 해결(解決)이 되지 못하고 신종악씨가 교회에 찾아오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