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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경성은 신장로 맡음

2013.11.25 16:13

aesan 조회 수:1164

*경성은 신장로 맡음


김광호 전도부인이 노춘섭 외(外) 몇 사람이 함께 어느 산에 가서 기도하는 중 이적을 보았다고 하여 교회 안에 거룩한 기분이 없고 은혜스럽지 못한 점이 있어 나는 염려가 되어 "조용히 기도하시고 성신의 감화를 기다리라."고 하였더니 목사는 신(神)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지목하여 그들끼리 수근거리는 것을 나는 짐작하였다.


하루는 신종악 장로를 보고 말하기를 “나는 어항(漁港)에 갈 터이니 신장로가 교회를 좀 맡아주시오.” 하였다. 교회가 이렇게 미신(迷信)이 심하여 교회가 되지 않을 줄 알지만 그렇다고 버리고 가는 것은 나의 부족이라 생각하고 또한 참고 기다리고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기로 생각하였다.


그 중에 노춘섭(盧春燮)씨의 일을 생각하고 나는 두려움이 있어 기도하였다. “주여 용서하시옵소서.” 그 해에 노춘섭(盧春燮)씨의 딸이 죽고, 사위도 죽고, 아들은 도적이 되여 징역하고, 노춘섭(盧春燮)씨는 어느 여학생의 병을 고쳐준다고 바닷가에 서 있다가 어느 장로에게 두둘겨 맞고 부끄러워 있을 수가 없어 희문으로 이사 가고 그 예배드리던 교회는 폐지(廢止)되고 말았다. 그 곳 교우들은 벌 받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몇 사람의 선동으로 미신이 고쳐지지 않으니 참 가엾다.


김득수 목사는 주을교회(朱乙敎會)에 파송(派送)되었는데 경성교회(鏡城敎會)의 미신에 물이 들어 경성(鏡城)에 와서 있다가 경성(鏡城)에도 있지 못하고 도로 주을(朱乙)로 와서 있는 것을 보았다. 경성교회(鏡城敎會)의 미신(迷信)소동이 청진(淸津)교회의 당파 싸움보다 더 어려운 문제이다.


*경실학교는 안흥석씨가 구입


청진(淸津)교회에서 급한 통지가 왔다. 고아원(孤兒院) 원장(院長) 안흥석(安興錫)씨가 지금 예배 보는 집을 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소문을 듣고 곧 청진에 가서 “안흥석(安興錫)의 처사(處事)를 불가라. 처음 경실학교(景實學校)에 예배 보기로 정할 때 고아원(孤兒院)으로 정(定)하였는가 교회에서 사기로 한 것이 아닌가.” 하고 항의(抗議) 하였더니 “교회는 다른 집을 살 수 있어도 고아원(孤兒院)은 이 집을 놓치면 다시 살 수 없습니다. 고아(孤兒)들과 같이 예배하면 좋지 않습니까?” 애걸(哀乞)하다 싶이 원(願)한다. “그러면 한국보(韓國補)씨와 의논하여 교회가 곤란치 않도록 하시오.”하고 돌아 왔다.


이때부터 전도사업과 고아사업(孤兒事業)이 같지 않음으로 교회직원들은 교회를 타처(他處)로 옮기자고 운동을 시작하였다. 안흥석(安興錫)씨의 말은 고아원(孤兒院)에 지금 곧 탁아소(託兒所)를 건축(建築)하는 중이니 교회가 좁다고 하시면 탁아소(託兒所)를 드릴 터이니 고아원(孤兒院)과 합동(合同)하시면 경비(經費)도 덜 들고 좋지 않느냐는 것이다.


경성교회(鏡城敎會)는 한국보(韓國補)씨에 대한 비평이 시작되었다고 편지가 왔다. 존폐문제가 있다하여 나는 곧 경성(鏡城)을 갔다. 한국보(韓國補) 목사는 잘 있는 목사라 다른 문제가 아니고 성경(聖經)을 바로 해석(解釋)하여 그들의 미신과 합(合)하지 못한 고로 옮기지 않으면 존폐(存廢)문제가 있다. 나더러 곧 오라는 것이다. 나는 그때 외손녀(外孫女)의 혼인(婚姻)을 보고 내려왔다. 청진(淸津)은 그때 교회 어려운 문제가 다 해결(解決)되고 잠잠한 때라 그리고 고아원과 합동(合同)예배만이 좀 시끄럽게 될 때이다.


* 어항에 오다

나는 먼저 어항(漁港)으로 와 있으며 고생을 참고 견디었다. 어항(漁港)은 교회가 없는 곳이오 오리 밖에 장로교회(長老敎會)가 있을 뿐이다. 정고송이란 청년의 집을 매월(每月) 25원을 주고 얻었다. 어항교회(漁港敎會) 설립할 때 신종악 장로는 내가 가는 것을 찬성하면서 경성에서 50원씩 보조(補助)하겠다는 것은 한 푼도 오지 않고 총리원 보조 40원 가지고 집세 25원 주고 15원이 남는다. 우리 숙자는 빨래품도 바느질품도 해서 사느라고 무수한 고생을 겪었다. 몇 달 후에는 교우들이 한(限) 30명 모이더니 교회 몇 사람들이 의논하고 집세는 우리가 물어보자고 의논되어 그 이듬달부터는 보조(補助) 40원을 생활비(生活費)로 쓰게 되었다. 그때 교우 중에 황영재 선생(先生)이 그 아들 황종우군을 데리고 와서 예배를 도와주었다. 집세 담당한 것이 그 선생(先生)의 힘이다. 그는 수원(水原)사람이다.


* 홍종숙 목사의 퇴거


그때 청진(淸津)교회에서는 한국보(韓國補)씨가 오기 전에 안흥석(安興錫)씨 자기 마음대로 홍종숙 목사를 청하여 같이 있게 되었는데 일년(一年) 지난 후에 근 80여명의 교우가 모이던 교회가 12월 최종(最終) 주일(主日)에는 홍목사 내외분(內外分)과 장연옥 속장(屬長) 세분이 예배하고 교우가 흩어졌으니 나는 사임(辭任)하고 상경(上京)한다는 편지가 왔다. 그러나 어항(漁港)교회를 버리고 갈 수가 없어 기다리는 중 청진(淸津)교회 교우 몇 분이 어항(漁港)에 와서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가산집물(家産什物)을 이고, 지고, 싣고서 강제(强制)나 다름없이 청진(淸津)으로 들어가기를 청한다.


나는 다시 생각 하였다. 내가 청진(淸津)에 와서 교회 5처(五處)를 설립(設立)한 중 청진교회(淸津敎會)가 중심(中心)인데 청진교회(淸津敎會)가 없어지면 청진(淸津)의 감리교회(監理敎會) 전체(全體)가 없어지는 셈이다. 나는 청진(淸津)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하고 떠났다. 어항교회(漁港敎會)의 설교(說敎)는 임시(臨時)로 황영재(黃英在) 선생(先生) 부자(父子)에게 위임(委任)하고 떠났다.


청진(淸津)에 오니 교우들은 “고아원(孤兒院)을 떠나자”고 격론(激論)이 되었다. 이때에 나는 한국보(韓國輔)씨를 정하였으면 하나 교우들이 그렇게 원하지 않았다. 그 때 경성(鏡城) 사회(社會)에서 박미자 속장(屬長), 마루기 속장(屬長), 이재익 집사(執事) 등이 불평(不平)하여 “김진호 목사가 왜 갔는가?” 하는 것인데 신종악씨는 답(答)하기를 “김목사 자신(自身)이 간 것이요 교회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고 변명(辨明)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