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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경성미신

2013.11.25 16:11

aesan 조회 수:1794

* 최주경의 금배관(禁拜官)에서


이 때 안흥석(安興錫)은 무슨 이유인지 예배에 결석(決席)한지 수월이라. 이번 사건(事件)과는 하등 상관(相關)이 없건마는 최주경(崔柱景)의 일파(一派)는 모두 안흥석(安興錫)의 소행(素行)으로 지목한다. 자기가 함정(陷穽)을 파고 자기가 도리어 빠졌다. 털끝만치도 성경(聖經)말씀이 틀림없다.


며칠 후 또 고등계(高等係)의 호출(呼出)이 있다. "조사(調査)해 본 결과 안흥석(安興錫)과 최주경(崔柱景) 사이의 감정(感情)문제(問題)이고 다른 사건(事件)이 없으니 석방(釋放)하면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좋다."고 대답함에 그 자리에 최주경(崔柱景)을 불러 알아듣게 일러서 놓아 보내려고 최주경 (崔柱景)에게 다시 신중(愼重)한 명령(命令)을 내리였다. "너는 다시 감리교회 (監理敎會)에 가서 예배 보지 말고 만일 또 무슨 불온(不穩)이 있으면 그 때에는 단불용서하리라." 하고 나더러 “그런 일이 있거든 곧 보고(報告) 하라.”고 부탁(付託)한다.


“그리고 목사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책임이 있습니다. 원컨데 본서(本署)에서 우리 감독(監督)본부(本部)에 공함(公函)하여 파임(派任)을 권고(勸告)하시면 나에게 그런 일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임(辭任)하라는 것이 아니고 책임을 각오(覺悟)하라는 말이다." 한다. 그 때 교회의 주요직(主要職)은 다 최파(崔派)의 인이다.


그 다음 주일(主日) 본 교회 직원회(職員會) 해산(解散)을 선언(宣言)하고 다시 예배를 시작(始作)하여 우리 부처(夫妻)와 그외 동지(同志) 몇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데 최파(崔派)의 사람 이기수(李基洙), 손영춘(孫榮春), 엘리사벳, 박성녀(朴姓女)등 십 여인이 다 퇴교(退敎)하고 최파(崔派)에 관계(關係)가 없는 사람도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몰라 관망하는 자들도 있어 자급(自給)도 교인수(敎人數)도 태반(太半)이나 줄어졌다.


우리는 엎드려 기도하여 주께서 원(願)치 않은 일이면 교회가 해산(解散)될 것이고 원(願)하시면 다시 부흥(復興)되리라 생각하고 힘써 기도하는 중 일반(一般)교우들은 진상(眞相)을 알고 다시 모여 전보다 사랑스럽고 신령(神靈)하여 자급(自給)이든 출석(出席)이든 조금도 손색(遜色)이 없다. 이번 일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 교회를 시험(猜險)하심이라.


* 경성 미신


하루는 경성(鏡城) 신종악(申鐘嶽) 전도사(傳道師)의 보고(報告)가 있었다. 경성교회(鏡城敎會)에서 한국보(韓國補)씨를 배척(排斥)하여 문제(問題)가 시급(時急)하다고 하여 나는 그 이튿날 경성(鏡城)에 가서 조사(調査)하여 본 결과 신앙(信仰)문제(問題)이고 한국보(韓國補)씨는 조금도 잘못이 없다.


그러나 이것을 고치기 위하여 한국보(韓國補)씨가 그냥 주재(駐在)하여 있으면 교회 (敎會)의 존폐(存廢)문제가 있을 것 같아 한국보(韓國補)씨와 상의(相議)하고 청진(淸津) 와서 있게 하라 부탁(付託)하고 곧 돌아와 그 이듬해 1942년 2월 6일에 경성(京城) 외손녀(外孫女)의 혼사(婚事)에 참석(參席)하고 돌아오는 즉시 경성(鏡城) 으로 반이하니 청진(淸津)서는 원성(怨聲)이 불무(不無)하다. 청진은 그 때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다 해결되고 잠잠한 때라 그리고 고아원과의 합동예배만이 좀 시끄럽게 될 때이다. 그러나 교회를 위하여 아니할 수 없는 일이라.


경성교회(鏡城敎會)는 기도하는 교회라 너무 지나쳐 이상(異常)한 기분(氣分)이 있고 신령(神靈)하고 거룩한 맛이 적다. 성전(聖殿) 안에서 혹 춤추고 일, 혹은 기도할 때에 광규난양(狂呌亂攘)하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뛰는 일, 자빠지는 일, 예배석(禮拜席)이 수라장(修羅場)이 되어 버린다. "여러분 은혜가 넘치어 하는 일이지만은 신령(神靈)치 못하니 주의하시요. 바울이 유두고를 살리고 종용 하라 부탁(付託)하지 않았읍니까. 무슨 은혜가 있을수록 종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 후에 목사의 말이 어려워하여 조용은 하지만 암암리(暗暗裡)에 복비의 소리가 들리매 목사는 신(神)(=성신)의 교통(交通)이 없다는 것이다.


* 주을 김태옥


주을(朱乙)은 함북(咸北)의 일도회(一都會)라 온천(溫泉)으로 이름이 높고 또 탄광(炭鑛)이 가깝고 또 사기(砂器)와 질그릇 제조(製造)가 왕성(旺盛)하여 인물(人物)이 자꾸 모여드는지라. 그 곳에 교회를 세우면 하고 기도하던 중에 마침 감리교(監理敎)의 전도사(傳道師)로 있던 김태옥(金泰玉)씨 가 만주(滿洲)로부터 주을(朱乙)에 반이(搬移)하여 철공업(鐵工業)으로 생활하며 바울과 같은 정신(精神)으로 자급(自給) 전도(傳道)하는 열심 있는 일군이다.


금 2월에 김태옥(金泰玉)씨의 청원(請願)에 의하여 본부(本部)에 보고(報告)를 하였더니 또 정춘수감독(鄭春洙監督)의 설치계로 인가(認可)되였다. 조그마한 옥자(屋子)를 구입(購入)하여서 예배 지장(支障)이 없고 남녀(男女)교우 합 이십 여명이 모여서 자미(滋味)가 많았다. 불원등지에 장로교회(長老敎會)가 있는데 교우들이 서로 왕래(往來)하며 도와주고 조금도 불화(不和)가 없었다.


* 생기령 노춘섭


탄광을 중심으로 각처 인물들이 모여드는 생기령(生氣嶺)에도 교회를 설립(設立)하였으면 하고 기도하던 중 그 곳 속장(屬長) 전한영, 이연수 양씨의 청원(請願)에 의(依)하여 금년(今年) 4월에 보고(報告)하여 설치(設置) 인가(認可)가 되고 그 곳은 전도사(傳道師) 노춘섭(盧春燮)씨로 담임(擔任)을 정(定)하고 힘써 전도(傳道)하여 역시 구백 원 돈을 들여서 조그마한 집을 사고 근 삼십 여명의 교우가 모였는데 옥자구입에 노춘섭 (盧春燮)씨의 조력(助力)이 많았다.


이곳에 감리교(監理敎)의 문패(門牌)를 걸고 예배 보는 곳이 벌써 사처(四處)나 되여 목사 일인으로는 몹시 바쁘다. 한국보(韓國補)씨가 청진(淸津)에 이임(移任)한 후에 교황(敎況)이 어떠한가 궁금하였다. 구입(購入)하기로 내약(內約)이 있던 경실학교(景實學校)는 그냥 예배에 사용(使用)하는지 또한 구입(購入)할 수 있을지 기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