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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청진지역 교회개척

2013.11.25 16:03

aesan 조회 수:947

1. 청진지역 교회개척


* 삼청 궁정 담임


1935년 봄에 나와 인연(因緣)이 깊은 배재(培材) 교직(校職)을 던지고, 조그마한 교회 삼청동(三淸洞), 궁정동(宮井洞)두 교회를 맡아보게 되었다.


이 두 교회는 교우가 다 이산(離散)하고 거진 문을 닫게 되었다. 나는 교육(敎育)보다 전도(傳道)가 더 취미(趣味)가 있게 생각하고 힘써 전도(傳道)하고 심방(尋訪)한 결과 교우가 다시 모여 은혜가 점점 깊어졌다.


교우들은 이 늙은 노물(老物)을 영접(迎接)하여 목사로가 아니고 친아버지와 같이 사랑하여 주어 나의 자신(自信)도 이 교회가 나의 최후(最後)를 마칠 곳이라 생각하였다.


* 감리교 본부 초청


뜻밖에도 교회 감독본부(監督本部)에서 나를 초청(招請)하여 북선전도(北鮮傳道)를 명(命)하였다. 나는 감독(監督) 정춘수(鄭春洙)씨를 가보고 말하기를 "우리 감리교(監理敎) 청년 목사가 근 이백명이나 되는데 하필(何必) 이 늙은 노물(老物)을 청하여 이런 중요(重要)한 성직(聖職)을 맡기는가." 하고 물으니.


정감독은 말하기를 "청진교회(淸津敎會)가 채 설립(設立)도 되기도 전에 암암리(暗暗裡) 분쟁(紛爭)이 있으니 청년목사들에게 맡기면 그 교회 존재(存在)까지 위험(危險)할 뿐만 아니라 본부(本部)의 위신상(威信上) 수치(羞恥)가 될까 염려(念慮)인 고로 노련(老鍊)한 김목사(金牧師)를 택(擇)하였으니 사양(辭讓)하지 말라."고 부탁(付託)까지 한다. 나는 서슴치 않고 가기로 승낙하였더니 두 교회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직원들이 연명청원을 드려 유임하기로 맹렬한 운동을 일으켰다. 정감독(鄭監督)은 명년(明年) 춘(春)에 다시 소환(召還) 하기로 숙제(宿題)를 두고 그 운동(運動)을 정지(停止)시켰다.


* 경성교역 초청


발정(發程)하기 삼일 전에 경성교역(京城敎役)들의 초청(招請)에 의하여 갔더니 어느 청년 목사가 말하기를 "본부(本部)에서 이 사람을 청하여 청진전도(淸津傳道)를 명(命)하였는데 나는 모험(冒險)할 수 없고 용기(勇氣)가 나지 않아 불응(不應)하였더니 노년(老年)목사님이 한도(寒都)를 불원(不願)하고 모왕(冒往)하시니 저희 청년들은 참 부끄럽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 북행차 타고 청진행


처(妻) 숙자(淑子)와 동행(同行)하여 1940년 6월 27일 오후 4시 경성역(京城驛)에서 북행차(北行車)를 타고 그 이튿날 28일 조 8시에 청진역(淸津驛) 에 도착(到着)하였다. 하차(下車) 즉시(卽時)에 근 10명의 교우들이 역두(驛頭)의 좌우(左右)에 열립(列立) 하였는데 좌(左)의 사람은 좌(左)로 가자고 우(右)의 사람은 우(右)로 가자고 기분(氣分)이 이상(異常)하였다.


좌(左)의 사람은 안흥석(安興錫)씨인데 칠팔인의 동행(同行)이 있고, 우(右)의 사람은 최주경(崔柱景)씨인데 이삼인의 동행(同行)이 있다. 나는 정감독(鄭監督)의 말을 들었는지라, 교회내(敎會內) 분쟁(紛爭)이 역두(驛頭)에서부터 시작(始作)하였으니 나는 조심할 필요(必要)가 있다 생각하고


“이제 여러분들의 인도로 갈 것 아니고 어디든 믿는 형제(兄弟)의 여관(旅館)으로 가겠노라.” 하고 자동차(自動車)를 불러 타고 성결(聖潔) 교우 박희천(朴禧天)씨의 여관(旅館)으로 가게 되었다.


* 청진교회 당파싸움


두 파의 형제자매(兄弟姉妹)들도 여관(旅館)에 몰려왔다. 인사(人事)의 말도 채하기도 전에 안흥석(安興錫), 최주경(崔柱景) 두 사람이 서로 시비(是非)의 변백(卞白)을 청하는 듯이 높은 언성(言聲)이 시작된다.


“여러분 용서하시요, 밤새도록 차멀미로 취(醉)하여 여러분과 담화(談話)할 힘조차 없으니 조금 정돈(整頓)된 후 오늘 오후 여섯 시에 다시 오시면 하오.” 하고 잠깐 기도하고

교우들을 보낸 후에 자리에 누웠다. 석식을 마친 후에 두 파의 교우는 또 모였다. 두 파의 말을 들어보아도 별로 분쟁(紛爭)을 일으킬 만한 일이 없고 다만 권리(權利) 다툼뿐이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시비(是非)를 변백(卞白)하기보다 여러분의 종이 되여 주의 뜻을 봉행(奉行)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이렇게 분란(紛亂)을 짓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니라 하고 다시 성경(聖經)을 보고 기도하고 쌍방(雙方)의 화해(和解)하라”고 권하였다.


안흥석(安興錫)씨는 통회(痛悔)하여 자복기도(自服祈禱)를 드리고, 최주경(崔柱景)씨는 소불동념(小不動念) 하고 안은 출교(黜敎)가 마땅하다고 주장(主張)한다. 이 때에 불과(不過) 십 여명의 교우가 서로 갈려 양처(兩處)의 예배소(禮拜所)가 있다. 그 자리에 선언(宣言)하기를 "나는 어느 편(便)에 치우치지 않고 두파의 합석예배(合席禮拜)를 원(願)하며 오늘은 토요(土曜)이고 명조예배(明朝禮拜) 시(時)엔 전에 감리교(監理敎) 문패(門牌)를 단 집에 가서 예배하고 저녁엔 분교(分敎)에 가보겠다."고 언명(言明)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