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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 목사 약사-김진호

2013.09.16 19:52

aesan 조회 수:1947

 

전덕기목사2.jpg

 

* 목사 전덕기 약사(牧師 全德基 略史)*

 

    < 이 자료는 원래 김진호 목사(金鎭浩 牧師)가 보관하다가 별세 후 셋째 아들인 김희영씨가 보관 중 송길섭 목사(전 감신대 교수)가 자택을 방문하여 이 자료를 보고 중요자료라 하여 갖고 갔다가 상동교회에 기증. 1990년 11월 10일 상동교회 박물관에 현재보관 중 복사하여 옴. 김주황 >

 

    목사(牧師)의 성(姓)은 전(全)이요 휘(諱)는 덕기(德基)니 본(本) 정선인(旌善人)이라. 부휘(父諱)는 한규(漢奎)요, 모(母)는 임씨(林氏)니 일찍 경성(京城) 서부(西部)정동(貞洞)에 거(居)하였더라.

 

    1875년 12월 8일에 공(公)이 정동사저(貞洞私邸)에서 생(生)하니 천성(天性)이 관오(款晤)하여 유시(幼時)에도 부모(父母)를 순종(順從)함이 성인(成人)과 여(如)하더라. 후(後) 1884년 8월에 부한규(父漢奎)가 몰(沒)하고 동11월에 모임씨(母林氏)가 역몰(亦沒)하니 시(時)에 공년(公年)이 9세(歲)라.

 

    정세영고(情勢榮孤)하여 사고무의(四顧無依)하고 년차유약(年且幼弱)하여 고불능자 변생활(姑不能自辨生活)이라. 어시(於是)에 그 숙부(叔父) 성여가(成汝家)에 왕의(往依)하니 성여(成汝)가 그 고독무양(孤獨無養)함을 애(哀)하여 무휼(無恤)함이 기출(己出)과 무이(無異)하더라.

 

    그 후(後)에 선교사(宣敎師) 아펜셀라씨(雅扁薛羅氏)와 박사(博士) 시란돈씨(施蘭敦氏)와 그 대부인(大夫人) 변돈시란돈(邊墩施亂敦)씨가 원(遠)히 미주(美洲)로부터 래(來)하여 정동(貞洞)에 교거(僑居)하여 주(主)의 진도(眞道)를 전파(傳播)할새 시(時)에 국인(國人)이 목지이이유(目之以異類)하고 양지이이단(壤之以異端)하여 신교자(信敎者)를 대지여이복(待之如夷복) 고(故)로 인개준순기피(人皆逡巡忌避)하여 진교(進敎)를 불긍(不肯)하더라.

 

    공(公)이 또한 반시(反視)의 측(側)에 립(立)하여 선교사(宣敎師)를 종종무시(種種無視)하여 방해(妨害)하고자 하더니 일일(一日)은 그 주택(住宅)에 와력(瓦礫)을 난척(亂擲)하여 유리창(琉璃窓)이 파쇄(破碎)한지라.

 

    일인(一人)교사(敎師)가 출(出)하여 먼저 소갈(소喝)을 용(用)치 아니하고 도리여 온언(溫言)을 가(加)하여 위무(慰撫)하여 주(主)를 신(信)하라 권(勸)하거늘 시(時)에 공년(公年)이 17이라. 차(此)가 동기(動機)가 되여 그 교사(敎師)의 언(言)이 공(公)의 심흉(心胸)을 감동(感動)하였더라.

 

    이에 중노(衆怒)와 군시(群猜)을 고(顧)치 아니하고 선교사(宣敎師) 시란돈(施蘭敦)씨를 종(從)하여 주(主)의 진도(眞道)를 학(學)할새 주(晝)에는 인(人)의 용역(傭役)을 작(作)하여 생활(生活)하고 야(夜)에는 성서(聖書)를 연구(硏究)하여 거의 식식(息食)을 망폐(忘廢)하더라.

 

    공(公)의 근독(勤篤)은 자못 천성(天性)이라. 비록 기한서우(祈寒署雨)가 유(有)할지라도 예배야(禮拜也) 기도야(祈禱也)에 일차(一次)도 결석(缺席)함이 무(無)하고 더욱 진리(眞理)의 각오(覺悟)가 심(深)할수록 공(公)의 영성(靈性)이 점점(漸漸) 발휘(發揮)하더라.

 

    1896년에 시란돈(施蘭敦)씨에게 세례(洗禮)를 수(受)하고 동(同) 18년(年)에 속장(屬長)의 직(職)을 수(受)하였고 1901년에 경지방회(京地方會)공천(公薦)으로 상동교회(尙洞敎會) 권사(勸師)를 피임(被任)하였고 동(同) 2년(年)에 전도사(傳道師)의 직첩(職帖)을 수(受)하였더라.

 

    자후(自後)로 천국(天國)사업(事業)에 헌신(獻身)하여 일호(一毫)라도 기사(己私)의 물루(物累)를 고(顧)치 아니하고 전(全)혀 주(主)를 애(愛)함과 인(人)을 구(救)함에 진심(盡心)진력(盡力)하는 고(故)로 평거(平居)에 용등(容滕)의 일옥(一屋)이 무(無)하고 계곡(係穀)이 항상 부족(不足)하더라.

 

    인(人)의 애경(愛慶)과 우락(憂樂)을 항상 같이하는 고(故)로 교우(敎友) 중에 병자(病者)가 유(有)하면 의사(醫師)를 불청(不請)하고 먼저 목사(牧師)를 청(請)하며 상자(喪者)가 유(有)하면 난고(難苦)와 위험(危險)을 불고(不顧)하고 진력(盡力)고견(顧見)하더라.

 

    처음 주(主)의 교회(敎會)가 먼저 정동(貞洞)에 권여(權輿)하였으니 선교사(宣敎師)등의 내한(來韓)주거(住居)가 차(此)에 시(始)함일러라. 어시(於是)에 경성(京城) 남문내(南門內)에 또 전도(傳道)구역(區域)을 특정(特定)하고 달성위궁내(達城尉宮內)에서 임시(臨時) 예배(禮拜)를 보았으니 차(此)는 곳 시란돈(施蘭敦)씨의 사옥(私屋)이러라.

 

    일시(一時) 권차(權借)에 불과(不過)한 고(故)로 선(先)히 시란돈가(施蘭敦家) 월편(越便) 상동(尙洞)에 수십간(數十間) 옥자(屋子)를 신축(新築)하고 전도(傳道)와 예배(禮拜)를 차(此)에 확정(確定)하였으니 자차(自此)로 상동교회(尙洞敎會)라 하는 기명(基名)이 종교계(宗敎界)에 현(現)하게 되었더라.

 

    공(公)이 본교회(本敎會) 설립시(設立時)부터 회개(悔改)수세(受洗)하였고 1818년부터(?) 시무(視務)하여 신혼(身魂)의 노췌(勞悴)와 생활(生活)의 고랄(苦辣)을 끽진(喫盡)하여 영적사업(靈的事業)에 국췌무여(鞠悴無餘)함으로 형제자매(兄弟姉妹)들이 다 애지경지(愛之敬之)하여 매양 연회시내(年會時內)이면 환체(換遞)될까 예공(預恐)하더라.

 

    교우(敎友)가 점점 증가(增加)하여 현시(現時) 예배소(禮拜所)는 수용(收容)키 난(難)한 고(故)로 내외국인(內外國人)의 의연(義捐)을 구취(鳩聚)하여 교당(敎堂)을 다시 건축(建築)하니 근(近) 백간(百間)이오 가용(可容) 천여인(千餘人)이라. 차시(此時)에 다수(多數)의 교우(敎友)가 원흥좌(苑興左)하여 하나님을 찬송(讚頌)하더라.

 

    1903년(年)에 본감리회(本監理會) 규칙(規則)을 의(依)하여 엡웻 청년회(靑年會)를 설립(設立)하니 회원(會員)이 무려(無慮) 수천(數千)이라. 공(公)이 회장(會長)으로 출석(出席)하여 매주(每週) 목요(木曜) 하오(下午) 7시에 통상(通常) 회(會)를 개(開)하고 주(主)의 말씀 전파(傳播)하기와 고통(苦痛)에 함익(陷溺)한 인민(人民)을 구원(救援)하는 일에 출력(出力)하고 그 중에 특색(特色)으로 칭(稱)할 자(者)는 아민(我民) 1014인(人)인 무뢰(無賴)의 유화(流話)를 인(因)하여 묵서가(墨西哥,멕시코)에 견매(見賣)하였더니 이족(異族)의 학대(虐待)와 난민(鸞民)의 악행(惡行)이 무소부지(無所不至)하여 태(殆)히 생명(生命)을 지(支)치 못하는 고(故)로 차(此)를 시찰(視察)코자 엡에 회(會)에서 발기(發起)하여 2인(人)을 파송(派送)하였고 또 청년학원(靑年學院)을 설립(設立)하여 교육(敎育)에 노력(努力)하였더라.

 

    그 후(後)에 시세(時勢)의 저애(沮碍)를 인(因)하여 엡웻회(會)는 정지(停止)하였고 그 후신(後身)되는 청년학원(靑年學院)은 계속(繼續) 유지(維支)하더라. 연(然)이나 경비(經費)가 군색(窘색)하여 자기(自己)의 신금(薪金)을 경진(傾盡)하고 사회(社會)의 의금(義金)을 청구(請求)하며 기어(基於)이 활동(活動) 하정(何灯)의 이용(利用)으로 왕왕(往往) 보용(補用)하여 기어(其於) 7회(會) 졸업(卒業生)까지 수여(授與)하였으니 금일(今日) 그 교육(敎育)을 수(受)한 졸업생(卒業生)이 혹(或) 교육(敎育) 혹(或) 전도(傳道) 혹(或) 상업(商業)으로 족(足)히 공(公)의 지망(志望)을 부(副)할 자(者)가 다(多)하더라.

 

    또 1904년(年)에 상동교회내(尙洞敎會內)에 공옥학교(攻玉學校)를 설립(設立)할새 초(初)에는 전도실(傳道室)에서 아동(兒童) 6,7명을 모집(募集)하여 교수(敎授)하더니 그 후(後)에 점차(漸次) 증모(增募)되여 이백여명에 달(達)한지라. 공(公)이 차(此)에 분발(奮發)하여 오천여원의 의금(義金)을 우득(又得)하여 교실(敎室)를 건축(建築)하니 가용(可容) 삼백명 생도(生徒)라. 아(我) 감리회(監理會)의 일초안(一稍完)한 소학교(小學校)라 칭(稱)하더라.

 

    1907年에 매년(每年) 회장(會長) 하리스(河理스,해리스)씨의 안수(按手)로 목사(牧師) 성품(聖品)을 수(受)하고 동(同) 10년(年)에 장로사(長老師)의 성품(聖品)을 우수(又受)하였더라.

 

    자후(自後)로 신체(身體)의 건강(健康)을 고(顧)치 아니하고 더욱 사업(事業)에 노취(勞취)하더니 시년(是年) 춘(春)에 인천(仁川)교회(敎會)에 하왕(下往)하여 사경회(査經會)를 인도(引導)하고 회환(回還)하는 차상(車上)에서 구혈증(龜血症)이 생(生)하여 부병귀가(扶病歸家)한 후(後)에도 일(日)로 쇠약(衰弱)에 함(顑)하여 일년(一年) 2,3차(次)씩 발병(發病)하는 시(時)는 매매(每每) 기절복소(기絶復蔬)하더라.

 

    연(然)이나 병간(病間)이면 한번도 상석(床席)에 위(委)치 아니하고 반듯이 근무(勤務)하여 동년(同年) 추(秋)에 다시 신학교(神學校)에 상학(上學)하여 동년(同年) 12월(月)에 졸업(卒業)하였더라.

 

    또 상동교회(尙洞敎會)로 중심(中心)을 작(作)하고 전도(傳道)의 구역(區域)을 점차(漸次) 확장(擴張)함에 부속(附屬)한 지회(支會)가 범(凡) 6처(處)에 성라(星羅)하였더라. 교회(敎會)의 일어난 순서(順序)와 지명(地名)이 여좌(如左)하니

 

    1907년 공덕리교회(孔德里敎會)

    1907년 창의문교회(彰義門敎會)

    1908년 연화봉교회(蓮花峯敎會)

    1910년 북장동교회(北壯洞敎會)

    1912년 사촌리교회(沙村里敎會)

    1913년 녹번현교회(碌磻峴敎會)

 

    병세(病勢)가 점점(漸漸) 침고(沈痼)하여 교무(敎務)를 친집(親執)키 난(難)한 고(故)로 1913년도(年度) 매년회(每年會)에 지(至)하여 본회(本會) 교(敎)에 부목사(副牧師)를 치(置)하여 보좌(補佐)하고 공(公)은 휴가정양(休暇靜養)케 하였더니 익년(翌年) 추(秋)에 요부(腰部)에 대종(大瘇)이 우발(又發)하여 부득기(不得己) 의사(醫師)의 수술(手術)을 받게 되었더라.

 

    연(然)하나 공(公)이 병석(病席)에 와(臥)하여도 혹(或) 교우(敎友) 중에 오래 출석(出席)치 않은 자(者)가 유(有)하면 반듯이 송인권면(送人勸勉)하며 인(人)을 대(對)하여도 자기(自己)의 병력(病力)을 출(出)하여 진리(眞理)를 경각(警覺)케 하며 죄인(罪人)을 위(爲)하여 기도(祈禱)하는 말이 태(殆)히 구부절성(口不絶聲)하더라.

 

    또 익년(翌年) 춘(春)에 지(至)하여는 더욱 침중(沈重)하여 와상불기(臥床不起)하는 고(故)로 일반(一般) 형제(兄弟)자매(姉妹)가 기도회(祈禱會)를 개(開)하고 병유(病愈)하기를 간절(懇切) 기원(祈願)하더라.

 

    동년(同年) 3월(月) 23일(日) 하오(下午) 1시(時)에 상동주택(尙洞住宅)에서 영혼(靈魂)이 이세(離世)하시니 본교회(本敎會) 임원(任員)등이 협의(協議)하고 동월(同月) 28일 상오(上午) 10시(時)에 본교회(本敎會)에서 노보을 감리사(魯普乙監理司) 주례(主禮)로 장례(葬禮)를 강(講)하며 동일(同日)에 고양군(高陽郡) 두모면(豆毛面) 수철리(水鐵里)에 안장(安葬)하니 시(時)는 1914년 3월 28일이요 공년(公年)은 39세(歲)러라.

 

    그 부인(夫人)은 조씨(曺氏)니 사자(四子)를 생(生)하니라. 장(長)은 진택(鎭宅)이니 배재중학(培材中學) 별과(別科)에 졸업(卒業)하고 차(次)는 진원(鎭垣)이니 배재(培材)에 재학(在學)하고 그 차(次)는 진수(鎭守)니 공옥학교(攻玉學校)에 재학(在學)하고 그 차(次)는 진국(鎭國)이니 상학어음유(尙學語飮乳)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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