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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2)

49. 하나가 되라 / 요한복음 17:11, 2반(半)


체부동(體府洞)


此祈禱, 主之最終긔도也. 言簡意盡, 而其中最金言者一也, 一是敎會第一急務, 非則不可成天國故耳. 保羅已言爲一之, 而敎人不知此, 故不能爲一, 心有二主, 故又不能爲一, 心在物者 不能與主爲一, 心在主者, 又不能與物爲一. 孔子曰 吾道一以貫之 , 耶蘇敎亦一以貫之, 表裏不同者, 不能爲一, 外親內疎, 如方底而圓蓋, 安能相合也? 孟子曰 苟能一之, 孰能禦之? 吾敎人苟能一, 何憂不成也? 不患無金, 不患無力, 不患無敎堂. 夫婦之間. 苟有一心, 何憂衣食也? 夫婦不合, 則費用倍入, 而無一成功. 噫不一之害也! 國民不一, 則爭奪屢起, 外侮日至, 國不能爲國也. 此吾等所目擊也. 將卒不一致, 則士無鬪心, 虜已渡江矣. 苟能一心, 則何患國小, 何患力弱也? 昔者 多瓦納國, 英艦入之欲滅, 瓦人總六十人, 幷持武器對之, 英不能犯. 由此觀之, 一者天下之大力也. 然則吾等欲建理想之天國, 而欲不一而能成乎? 今擧不一之弊果何在. 人各自利, 故不能爲一. 保羅曰 貪心卽偶像也. 吾等最惡者, 偶像也. 心有貪則我最惡之偶, 隱然在我, 與聖神不能爲一, 我與人共入禮拜堂, 而我坐便利之席, 不欲讓與他, 是自然我彼爲二也, 我服美衣而惡與人, 處我精而彼不精, 是精粗爲二也, 我與人食而我欲甘旨, 而不甘則與人, 是甘苦自分爲二也. 我與人取物, 我欲堅美而粗惡則與彼, 是美惡自分爲二, 是皆利己者, 不能與人爲一之証也. 均添利益, 是道德也. 我飽而不顧人飢, 我暖而不知人寒, 使天下之人, 相率而爲禽獸者, 是利己心也. 虎臥山中, 捕百獸而食不知恥, 與此何異也? 噫天下滔滔皆是, 未知何日能一之也. 此非他, 人各利己害人故耳. 人勞而我亦勞, 人飽而我亦飽是一也. 我有百體, 百體中一體不幸, 則他百體亦共爲不幸, 他一體和平, 則百體從取和平, 大哉! 一之爲利也. 孟子曰 孰能一之, 對曰 不嗜殺人者能一之云. 害人卽殺人, 不奪不厭, 終至殺人. 故我亦曰 不嗜害人者能一之, 不嗜利己者能一之也. 不觀夫植物乎? 大樹之下, 小樹不能成長何故? 大樹獨沾空中之雨露, 使小樹不能共沾雨露也. 小樹若欲均沾利益, 則必先伐大樹然後可矣. 吾等欲與人爲一, 則當去利己心而後可爲一也. 其次, 欲自高者不能爲一, 有高則必有卑, 理勢然也. 有上則必有下, 有前則必有後, 故或曰 人物有高下, 理所不免也. 此人間所刱之物也, 吾主胸中, 何嘗有尊卑乎? 人間刱尊卑, 彼高我卑, 自有不平. 尊者欲食卑者, 我爭不已, 然謙而升之則可也. 王太祖之群臣推之上客廳, 而呼萬歲, 人稱王祖之德, 然如始皇, 而欲滅天下之王者, 而欲獨爲皇帝, 終至失敗, 如亢龍有悔, 昔全德基傳道于懷德等地, 而至一家禮拜, 或在堂下, 或在堂上, 問之則在堂下者, 皆奴僕也. 全曰 不可, 主前皆平等, 勸之使上, 同爲禮拜云. 吾等胸中, 有堂上堂下乎? 保羅曰 勿望高而常處卑也, 誠哉是言也. 主亦曰 勿坐首座, 後必降坐下座云, 人若自高 而人不推之, 則是分之爲二也. 然若謙而升之, 則雖高必平等. 昔아브라함이, 若欲自高, 則入迦南必以智服迦人, 又力制迦人 必滅迦人而後, 自爲帝王乃已, 然아보라함이 不然, 爲迦人受福之機關, 故與迦人爲一而處也. 바벨塔下居人, 築塔而欲自高, 故主散其族而爲二, 使之弱也. 吾人雖不能, 然當如아보라함之福關, 何以爲他人之福乎? 我驕而能之乎, 必如아보라함之謙遜, 與迦人爲一而後可矣. 我心中 如有바벨塔之高, 則亦不可, 我有美屋乎? 亦바벨塔也. 我有文學而驕乎? 亦바벨塔也. 我有金錢及名譽而驕乎? 亦바벨塔. 心中有信仰之驕乎? 亦바벨塔也.


이 기도 말씀은 주님의 최후 기도입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하고 싶은 생각은 다한 것으로써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금언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하나는 교회에서도 첫째 해야 하는 긴급한 의무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천국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미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교인들이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마음에 두 개의 주장이 있기 때문에 또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물질에 있는 자는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주님에게 있는 자는 또 물질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공자님이 이르기를 나의 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였고, 예수교도 역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팎이 다른 자는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친하지만 속으로 꺼리면, 마치 네모난 바탕에 둥근 뚜껑을 덮는 것 같으니 어찌 합쳐질 수 있겠습니까? 맹자는 진실로 하나로 뭉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우리 교인도 실로 하나로 뭉친다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돈 없는 것도 근심할 게 없고, 힘이 없는 것도 근심할 게 없으며, 교회당이 없는 것도 근심할 바가 없습니다. 부부사이에도 실로 한 마음이 된다면 옷 입고 밥 먹는 생활을 근심할 게 있겠습니까? 부부가 하나로 합쳐지지 않으면 비용은 배가 들어도 한 가지도 성공하는 것이 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한 해로움이여. 국민의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싸우고 빼앗는 일이 자주 생기고 외국의 침략을 불러들여 그 나라는 나라로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목격한 바입니다. 장수와 병사가 하나로 뭉치지 못했을 때 병사는 싸울 뜻이 없어져서 오랑캐가 강을 건너오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하나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면 나라가 작다고 근심할 것이며 힘이 약하다고 근심하겠습니까?


옛날 다와랍국(多瓦納國)에 영국 함대가 침입하여 멸망시키려 하자, 총 80명의 다와랍 사람들이 모두 무기를 가지고 대항하여 결국 영국이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볼 것 같으면, 하나가 되는 것은 천하에서 큰 힘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이상적인 천국을 만들려고 하면서 하나가 되지 않고 이룰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하나가 되지 못함으로써 오는 폐단이 과연 어디 있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각기 자기만 이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르기를 탐심이 곧 우상이다라고 하였는데, 우리들이 가장 미워할 것은 우상입니다. 마음에 탐내는 것이 있으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우상이 은연중에 나에게 있게 되어 성령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예배당에 들어갔을 때 내가 편리한 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면 이는 저절로 나와 저사람 사이에 둘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옷을 입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기를 싫어하는 것은, 나는 좋은 것이나 저 사람에게는 좋지 못한 것이 되어 이것이 좋고 나쁜 것의 둘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음식을 먹는데 맛있는 것은 내가 먹고, 맛없는 것은 다른 이에게 주려고 한다면 이는 맛이 있고 없고가 저절로 둘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남과 함께 물건을 가지는데 튼튼하고 좋은 것은 내가 갖고, 조악한 것은 남에게 주려고 한다면 이는 좋고 나쁜 것이 저절로 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다 이기자(利己者)로서 다른 사람과 하나 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이익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나는 배부르면서 남의 굶주림은 돌아보지 않고, 나만 따뜻하면 되고, 남의 추위는 나 몰라라 하면 천하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금수가 되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산 속에 누워서 온갖 짐승들을 잡아먹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하! 이 세상이 이런 풍조로 넘쳐나는데 어느 날이나 하나로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 이롭게 하고 남을 해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노력하면 나도 노력하고, 남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게 되어야 바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에는 백 가지 기관이 있습니다. 백 가지 기관 중에 한 기관이라도 불행하게 되면 나머지 백 가지 기관들도 함께 불행하게 됩니다. 그 한 기관이 화평하게 되면 나머지 백 가지 기관도 화평을 가지게 됩니다.

위대한지고! 하나가 되는 이로움이여. <맹자>에 제 선왕이 묻기를 누가 천하를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까 하니, 맹자가 대답하기를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하나로 통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남을 해치는 것은 살인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는 성이 안 풀리면 마침내 살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도 남을 해롭게 하기를 싫어하는 자가 능히 하나로 이룰 수 있고, 이기적인 것을 좋아 하지 않는 자가 하나로 이룰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저기 식물을 보지 않았습니까? 큰 나무 밑에는 작은 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큰 나무가 공중에서 내려주는 비와 이슬 같은 은혜를 독점하여 받아버리고, 작은 나무에게 나누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은 나무에게 그 이익을 골고루 나누어 주게 하려면 반드시 큰 나무를 베어버린 뒤에야 가능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려면 마땅히 이기심을 제거한 뒤라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높은 곳이 있으면 반드시 낮은 곳이 있는 것이 이치입니다. 위가 있으면 반드시 아래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기 때문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사람이나 물건에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은 면할 수 없는 이치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속에 언제 일찍이 높고 낮은 존비의 등위가 있었습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높고 낮은 차등에 따라 저쪽이 높으면 이쪽이 낮게 되어 자연적으로 불평이 있게 됩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해치려고 하여 서로 다투는 일이 그치지 않지만 겸손한 태도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됩니다.


왕건 태조를 군신이 청사의 높은 자리에 추대하고 만세를 부르며 사람들은 왕 태조의 덕을 칭송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시황 같은 이는 천하의 왕들을 다 멸망시키고 홀로 황제 노릇을 하려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말았으니 마치 주역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이 후회하는 것(亢龍有悔, 항룡유회)과 같아졌습니다.

옛날에 전덕기(全德基) 목사님이 회덕(懷德) 등지의 지방에서 전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집에 들어가니, 예배를 드리는 시간인데, 어떤 이는 마루 위에서 예배드리고, 어떤 이는 마루 아래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마루 아래서 예배하는 자들은 모두 종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전 목사님이 이르기를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라고 설득하고, 다 함께 마루 위로 올라와서 예배드리자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도 마루 위와 마루 아래가 있습니까?

바울이 이르기를 높은데 올라가기를 바라지 말고, 늘 낮은 데 거처하여라 하였는데, 진실하도다, 이 말이여. 주님께서도 이르시기를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훗날에는 반드시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은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밀어주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둘로 되는 것입니다. 만일 겸손한 자세로 그 자리에 올라갔다면 아무리 높아도 반드시 평등한 것이 됩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만일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혜로 가나안 사람들을 복종시켰을 것이고, 또 힘으로 가나안 사람을 제압하여 가나안 사람들을 멸망시킨 뒤에 스스로 제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가나안 사람들을 복을 받도록 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가나안 사람과 하나가 되어 살았습니다.

바벨탑 아래 사는 사람은 탑을 쌓아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그 족속을 흩어서 둘로 만들어 힘을 약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비록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마땅히 아브라함처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교만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아브라함처럼 겸손하여 가나안 사람들과 하나가 된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나의 마음속에 만일 바벨탑을 높이 쌓으려는 생각이 있다면 역시 불가합니다. 내가 좋은 집을 가지고 있으면 역시 바벨탑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문학을 잘한다고 교만하여 되겠습니까? 역시 바벨탑입니다. 돈이 있고 명예가 있습니까? 역시 바벨탑입니다. 내 마음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만합니까? 역시 바벨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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