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17 19:11
279. 사(死)는 생(生)의 길 요한복음 4:47(궁조)
사람은 죽음을 알어야 예수를 믿는다. 죽음이 얼마나 비참하고 두려운 일이다. 이 세상에 죽음을 막을 수도 없고 면할 사람도 없다. 떨어진 꽃은 다시 피고 죽은 풀은 다시 푸르를 수 있으나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 이에 상제 왕 장군 문장 명사 재자 가인들이 다 면치 못한다.
그러나 죽음에서 다시 살고 없는데서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뿐이다. 그리하여 천하 인간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얻지 못한다 성경에 말씀하셨다. 이에 주께서 갈릴리로 가실 때 어느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으로는 고칠 수 없고 살릴 수도 없다. 한가지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예수를 만나 볼 작정하고 내려갔다. 최후에 한가 일이라. 교만한 마음 버리고 주 앞에 절하고 아들 병 고쳐 주시기를 청하였다. 이 사람의 생각에 아들은 죽음에서 멀지 않고 마지막 주를 청해 보는 것이다. 아들 죽는 것이 원통하여 차라리 자기가 죽었으면 하고 자기 있는바 소유를 다 바쳐도 아까울 것 없을 만큼 원통하였다. 죽음이 이렇게 중대한 줄 아는 신하는 주의 말씀을 들을 때 다소 위안을 받고 또 네 아들이 살었다는 말씀을 믿었다. 이것이 사는 길이다. 신하가 이런 죽음을 몰랐다면 이런 길을 찾을 수 없다.
나의 경험으로 볼지라도 아무 희망이 없이 죽게 될 때 난데없는 믿음이 생기고 주를 찾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때 그 때가 참 사는 날인 것을 몇 번 인식하였다. 뒤에 도적을 만나 도망할 때는 전에 뛰어 넘지 못하던 담도 뛰어 넘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당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물이 없어 죽을 때 나타나시고 날이 저문 광야에서 오천 명이 죽게 될 때 이적을 보이셨다.
그런 고로 사람의 생활은 날마다 죽음을 맛보는 가운데 참 사는 도리가 있다. 병법에 함지사귀 이후에 산다 함이 이 뜻이다. 그런 고로 삶의 철학은 죽음을 알어야 하고 죽음의 철학은 삶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야만 혹 짐승의 생활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미래관을 가지고 산다. 우리의 미래관은 불교나 유교 같은 미래가 아니요 우리는 거울 속으로 보는 것같이 본다.
원컨데 빙산을 통하여 건너다보면 삶의 약동하는 나라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는 나라가 보인다. 빙산만 통과하면 그 곳을 간다. 평영가수굴은 갈수록 캄캄하고 무섭지만 우리의 통과하는 물은 빙산이라 앞을 보고 간다. 나는 나이 많아 다 살었고 또 병이 있고 삶의 취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낙심하지 않는다. 앞으로 몇 해를 살던지 주를 위해 살고 마지막은 주의 허락하신 나라가 있으니 무슨 염려가 있으리오.
다시 보면 조선 사람은 다 죽은 것 같습니다. 경제에 쪼들려 죽을 지경이고, 공산당에게 쪼들려 죽을 지경이요, 전 민족이 죽음에서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38경계선에는 날마다 총소리가 들리고 인민군이 와서 불을 놓고 사람을 죽이며 살 수 없어 이산하는 민중이 날마다 늘어가는 중이오. 중원은 거의 적화가 되어 남경은 함락되고 상해가 또 위급하여 외인이 철퇴하고 공군이 또 퇴성하게 되었으니 동양적으로도 온통 흔들리는 중이라 어찌 살아야 할까?
조선의 기독교가 과거 50년 전에 사상가들이 종교를 이용하여 가지고 떠들기를 조선이 온통 예수를 믿으면 독립된다 하여 정치압박 받던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종교를 이용하다가 종교가 정객들의 이용물이 아님을 알고 모두 물러갔다. 요사이 와서는 참 종교로 나타나서 순교자도 나고 참 삶을 구하는 성도들이 조선에 있다. 의인 50 명이면 고모라를 구원하기로 허락하신 하나님이시라. 과거 50년간 ***수천이 종교를 이용하다가 패함 같이 과거 대 실패를 맛본 조선 사람은 이제야 참 삶을 구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