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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2)

36. 합당하지 못한 사랑 / 마태복음 10:34-39


人無正覺, 故事多不合也. 惟非惟是, 不在於人, 惟在於神也. 保羅曰 有大於心者, [요 一,三장 二十절]又曰 爾之裁判長在天, [얍四장 十三절] 主亦曰 爾勿稱我善, 善者惟主而已也. 吾宗敎, 愛爲中樞, 捨愛則無物也, 捨愛則無宗敎也. 使主血洒我心上, 血光所照, 爛然發光, 爲愛之痕, 故吾敎人心上, 無主血無生命也. 愛有精粗, 不可不察, 當硏究愛之眞理, 當愛愛, 不愛不義可也. 混言曰 愛非愛也, 愛之眞理, 果何在? 主爲此而比兵器者, 欲實現愛之眞理也. 愛爲万事之母, 而愛不合理, 故無結果矣. 故察之不合則去, 合則行. 吾果愛子, 合于眞理乎? 愛子有道理, 敎之以義方也. 不義則當痛責, 使之改悛而後止, 是爲眞愛子. 若忤父而行, 不知兵而欲持兵, 不知泳而欲泅水, 禁兵禁泳, 是親之愛, 而子欲行之, 則是忤父也. 師之愛徒, 合于眞理乎? 愛徒有道理, 敎之以義方, 不義則當去, 徒欲忤師而行, 廢讀而嗜飮, 惡賢而好色, 禁酒禁淫, 是師之愛, 而徒欲行之, 則是忤師也. 或曰 愛金是罪也, 貪金亦罪也, 然愛金不是罪人, 不愛金果浪費, 使父母飢餓, 是果合理乎? 貪則罪也, 貪則無所不爲, 害人害物, 欲網羅爲之是罪也, 又不合理也. 信者當處世而不染, 接物而不動也. 昔管寧鋤, 見有金而不顧, 後鋤者見金, 拾而復擲之, 前者不動, 後者動而不取, 是有差等, 信者當如前者之不動, 或如後者之動而不取也. 每事察其合不合, 而取捨可也. 今兵器云者, 卽戰爭, 戰爭欲和平也. 和其不和, 平其不平, 故戰爭起焉. 父子有兵器, 父欲禁子, 子欲忤父而行, 子欲諫父, 父不聽而行, 東亞日報, 有子殺父母者, 父不給子金錢, 故子害之而走, 是貪金而不愛父母, 是不合之欲也. 人不無欲, 欲而不合則罪也. 以罪爲愛是世也, 以理爲愛是天國也. 不合起兵器. 某靑年, 問余曰 某長老, 殖貨捧高邊, 人有怨聲, 是合道乎? 身雖長老, 不可不殖貨, 故殖貨非罪也, 以貨害人, 人有怨聲則不可, 是不合之愛也, 吾隣有逐婦者, 問其由, 四柱不合, 家內不寧, 故欲逐之, 聞者惡之, 然信者, 亦有虐婦者, 問其理, 婦性行不良云, 信者之虐婦, 與不信者之逐婦 何異也? 信者不言四柱不合, 而只言性行不合, 不信者不言性行不合, 而只言四柱不合, 其惡皆同也. 愛之組織, 卽家庭有父子焉, 有妻子焉, 有姑婦焉, 皆愛之序也. 其次國家, 其次社會, 其次團体等也. 此各等中, 人所易知者家庭, 故主言愛之理, 必先言家庭者, 人所易知故也. 人愛妻子, 必合于眞理, 而或失於偏, 或失於曲, 皆非眞愛也. 我之愛子, 必過於他人者, 我生之故也. 由此而我當思生我者, 又何人也, 我當愛生我者, 必不下於愛子, 而人皆愛子, 過於愛親者, 亦錯誤也. 人皆有錯誤, 某夜友人, 乘南行車, 友人深睡而起曰 元山已近乎? 余曰 是南行向京驛之車也, 友曰 不然, 吾發京城而向元山, 友人深睡中, 已忘發京離之事, 而不知還京之事也. 故妄言. 世人如是錯覺者, 深睡故也. 世人不覺主之聖血, 主爲罪人流血, 純愛而已也. 其血液中, 無他不良, 只純潔而已也. 不爲名譽, 不爲宿望, 不爲望報, 純愛而已也. 以世人之心窺之, 則主不必如是, 或謂妄, 或謂逆, 或謂惑, 終乃憎之釘殺, 人心之偏, 一何至此也? 主故曰 彼不知也, 元有錯誤, 架下之人大呼謂, 赦强盜而欲殺主, 甚矣世人之錯也. 昔伯夷叔齊, 叩馬而諫, 左有欲兵之, 太公曰 義人也, 扶而去之, 欲兵者 錯也, 扶去者義也. 彼得於主被捉之日, 拔劒削僕耳, 主曰 鞱劒,是錯也, 其前日, 彼得諫主, 曰 願不及主, 主曰 斯但手退, 彼得諫主亦錯也. 猶大之言, 欖油救貧亦錯也, 故主不許門徒之錯, 如是不可掩.


사람이 올바로 깨닫지 못하여서 인하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르다든가, 옳다고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울이 이르기를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요 1서 3장 20절] 하였고, 또 말하기를 너의 재판장은 하늘에 있다고 하였으며 , 또 너는 너 자신이 선하다고 일컫지 말라, 선한 자는 오직 주님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종교는 사랑이 그 중추가 되므로, 사랑을 버리면 아무 것도 없고, 사랑을 버리면 종교도 없습니다. 주님의 피로 나의 마음을 씻으면 광채가 나서 사랑의 흔적이 되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의 마음에 주님의 피가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정밀하고 거친 것이 있으니 살펴보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마땅히 사랑의 진리를 연구하여 마땅히 사랑할 것은 사랑하고, 의롭지 못한 것은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섞어서 말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진리는 과연 어디 있습니까? 주께서 이것을 가지고 병기(兵器)에 비유한 것은 사랑의 진리를 실현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일의 어머니입니다. 사랑이 이치에 합당하지 아니하면 결과가 없습니다. 살펴보아서 합당하지 아니 하면 버리고, 합당하면 실행해야 합니다. 내가 과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진리에 합당한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도 도리가 있으니, 올바른 방향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가거든 마땅히 통렬히 나무라서 잘못을 고치도록 한 뒤에 그쳐야 이게 바로 참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행하려고 하는 것은 무기를 쓸 줄 모르면서 무기를 가지려고 하고, 수영을 못하면서 물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기를 금지하고 수영을 금지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지만 자식이 그것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스승이 학생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에 합당한 것입니까? 학생을 사랑하는 데도 도리가 있으니 올바른 방향으로 가르치되 의롭지 못한 것이면 마땅히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이 스승의 뜻을 거스르고 행하려고 하는 것은 책 읽는 일은 피하고 술 마시는 일을 즐기는 것이며 훌륭한 사람을 미워하고 여색을 좋아하는 것이니 술을 금하고 간음을 금하는 것은 바로 스승의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학생이 그런 일을 행하려고 하면 이는 스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죄이고, 돈을 탐내는 것도 역시 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결과는 돈을 낭비하게 될 것이니, 그러면 부모를 굶주리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이치에 합당합니까? 돈을 탐내는 것은 죄가 됩니다. 돈을 탐내면 무엇이든지 함부로 하게 되어 남을 해치고 물건을 해롭게 하면서도 이것저것 모아 행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죄입니다. 또 합리적이 못 됩니다.

신앙을 가진 자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불의에 물들지 말아야 하고, 물건을 상대할 때도 욕심에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 관영(管寧)이라는 사람이 밭을 매다가 금덩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뒤에 오던 사람은 그 금을 보고 주워서 다 내버렸습니다. 앞서 본 사람은 욕심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뒤에 본 사람은 마음이 움직였지만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게 서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땅히 앞의 사람과 같이 마음이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의 사람처럼 마음이 움직였더라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그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를 살펴서 가지든지 버리든지 해야 옳습니다.

지금 여기서 무기라고 말한 것은 바로 전쟁입니다. 화합해야 할 것을 화합하지 않고, 불평이 평정되지 않아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부자간에도 병기가 있으니, 아버지는 자식이 하는 일을 금하려고 하나,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일을 행하는 이가 있고, 자식이 아버지의 잘못을 고치라고 간쟁(諫爭)을 하지만 아버지가 듣지 않고 행동으로 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아일보에 자식이 자기 부모를 죽인 자가 있는데 아버지가 자식에게 돈을 안 준다고 해치고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돈을 탐내느라고 부모를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합당하지 않은 욕심입니다. 사람치고 욕심이 없는 자는 없지만 그 욕심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죄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무기가 발동되는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나에게 묻기를 돈을 불리려고 높은 이자를 받으면 사람들이 원망을 하는데 이것이 도리에 합당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비록 장로라 하더라도 돈을 불리지 않을 수 없으니 돈을 불리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써 사람을 해롭게 하여 사람들이 원망을 하게 되면 옳지 못합니다. 이는 이치에 합당하지 못한 사랑입니다.

우리 이웃에 며느리를 쫓아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사주(四柱)가 맞지 않아서 집안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어 쫓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 중에도 며느리를 학대한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를 물었더니, 며느리의 성품과 행동이 불량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앞에 말한 바 신앙이 없는 자가 며느리를 쫓아내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신앙이 있는 사람이 사주가 맞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성품과 행동이 불합하다고 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성품과 행동이 불합하다고 는 말하지 않고 다만 사주가 불합하다고 했지만 그것이 악한 일인 것은 똑 같습니다.

사랑의 조직으로는 곧 가정에 있어서 부자가 있고, 처자가 있고, 고부가 있으니 모두 사랑을 해야 할 차례들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국가, 그 다음은 사회, 그 다음은 단체 등입니다. 이 각각의 단위 중에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한 사랑의 이치 중에 반드시 가정을 먼저 말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쉽게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혹은 치우쳐 실패하고, 혹은 정직하지 못하여 실패하게 되니, 이게 모두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자식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내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미루어서 나는 마땅히 나를 나아준 사람이 또 어떤 사람인가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마땅히 나를 낳아 준 사람을 사랑하는데 반드시 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못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기를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되니 이것은 잘못 된 착오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착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친구 한 사람이 남행 차를 탔습니다. 그 친구는 실컷 잠을 자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원산이 가까워지고 있느냐?고 했습니다. 내가 이 차는 남쪽으로 서울을 향하여 가는 차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우기기를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서울역에서 차를 타고 원산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잠자는 중에 이미 서울을 출발하여 떠나온 것을 잊고 서울로 돌아가는 일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헛소리를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와 같이 착각하는 것은 깊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께서 흘린 거룩한 피를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피를 흘렸으니 그것은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의 피 속에는 다른 불량한 것이 없고 다만 순결뿐이었습니다.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오랜 소망을 위한 것도 아니고, 보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사랑뿐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엿보면 주께서 이와 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허망한 일이라 하고, 어떤 이는 이치를 거슬렀다고 하고, 어떤 이는 무엇에 홀렸다고 하며, 마침내는 못 박혀 죽은 것도 미워하게 되니, 인심의 치우침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자기들이 하는 것을 본래 착오가 있어서 알지 못하느니라 하셨는데, 십자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이르기를 강도는 놓아주고, 예수는 죽이시오 라고 했으니, 세상 사람들의 착오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옛날 백이숙제(伯夷叔齊)는 주(周)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은(殷)나라를 정벌하지 말게 하라고 땅을 치며 간(諫)하자, 좌우에 있던 병사들이 칼로 찌르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강태공(姜太公)이 말하기를 의인(義人)이니 내보내도록 하라고 했으니, 찌르려고 한 자는 착오한 것이오, 내어 보낸 것은 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붙잡히던 날에 칼을 뽑아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자, 주께서 말씀하기를 칼을 칼집에 도로 넣으라. 이 일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전날에도 베드로가 주께 간(諫)하기를 원컨대 주님께는 이 일이 미치지 않게 하옵소서 말하자, 주님이 이르기를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하였으니, 베드로가 주께 간(諫)한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유대인의 말에 감람유로 가난한 이를 구원한다는 것도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착오를 허락하지 않은 사실은 가릴 수가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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