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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2)

34. 착오된 사랑 / 마태복음 10:34-39, 19:16-30

리태원


今言吾敎道德者, 必兼言信愛, 若以宗敎實踐躬行, 則愛爲之主, 故保羅言愛先於信, 主且與法利賽人, 常常衝突者. 彼主信, 而主則以愛爲主, 故吾敎恒言, 愛或失精粗, 墮於傍門異道, 必硏究愛之眞理, 當愛愛而不愛不義可也. 以信爲主, 則幼兒而已也. 以愛爲主, 則長年也. 幼兒但覓棗棠於其父母, 而不知棗棠施於人. 深入密室, 呼泣祈禱時, 則反如幼兒, 或自服, 或自責, 或至呼泣, 而至出于曠敞之世, 人物叢集, 万理來當, 余以渺然之躬, 當何以應之也? 惟愛而己也. 愛有眞理. 故不流於物, 人以怒氣乘我, 我澄然無事者, 我有眞理故也. 人以物色當我, 我凝然不動者, 我有眞理故也. 愛有如許偉力, 我東古者, 有偉人未成時, 曾夜讀書于廊舍, 隣有未成之女, 開門而入, 男子不顧讀書, 乃掩卷曰, 女當持杖而來, 欲撻女, 乃持杖而去, 後出家, 生子高顯, 乃陷讀書之男而判以死, 女乃持杖而往, 其子所言前日之事, 此人未必犯罪, 乃赦云, 此何也? 愛有眞理故也. 某會社兄弟, 一人累年以信用見用, 身且發貧, 且信主, 全家蒙恩, 一日社員一人, 持金而來曰, 此雖薄矣, 歲儀也. 勿嫌受之. 對曰 我當助汝, 我不必受, 乃持往. 其後又持二十金而來, 暇無而授其夫人而去, 夫人曰 此金某持來矣, 充用歲儀云, 對曰 不可受, 當還云耳. 夫人曰 何必如是也? 其後, 社長招謂曰, 君受何人之賂乎? 對曰 無也. 社長乃携投金者來, 乃思則其歲儀金也. 此乃非義之憂. 故後必綻露, 故曰 愛有眞理, 此是眞愛遠之. 天下必無效矣. 然世人愛不愛, 常有錯誤, 以此故也. 主言人家有兵器, 父子間有兵器, 母女間有兵器, 姑婦間有兵器, 此兵器自何而起也? 必由錯愛而起也. 今讀新聞, 有悖漢, 以書母脅迫其兄請金, 兄不聽, 乃懷劍入. 亂刺其母及其兄而走, 此亦由錯而起也. 此悖漢, 當愛兄母而不愛金, 今愛金而不愛母兄, 此錯誤之甚也. 今人抱子弄之, 有以珍物啗之, 有以珍物衣之, 無所不用其極, 子若割其愛子心之十分二, 與其父母, 則當爲孝子云. 人愛之錯誤, 以此證之. 愛子過於其父, 亦爲錯誤, 況愛金而不愛其父乎? 此禽獸不若也. 余嘗聞之, 有一貞婦, 養子以愛, 且施敎育, 自小學至大學, 此婦傭于針舂及洗濯, 以助工夫, 日日望子之歸, 子若歸之, 婦必去舂濯, 而必得榮光矣. 一日 其子卒業而歸, 入其洞, 見其母着襤縷洗衣, 其母見其子喜迎, 子之友人曰, 此何婦也? 子曰 隣之老姪也. 此子愛其名譽及學位, 而不愛其母, 錯之已甚矣. 有一姑禁婦之信, 此婦在親家篤信, 及出家, 夫家不信, 故禁之. 婦長跪陳姑, 姑曰 汝信則吾死後不祭, 汝信則隣里可愧, 此姑愛其死後虛無之祭, 而欲切禁, 不與飮食, 或放逐, 或冬夜宿廚間, 惟不怨極孝, 故姑感之許信, 此婦之在其家中, 如燭在暗中. 全家感之而信, 其後全洞信, 江華郡草芝, 有此事, 此婦之愛, 可謂眞正不誤. 今人雖信主守正, 罕如此婦之忍耐, 作撤無常, 故不能結果矣. 如有眞正之愛, 則何物能間之乎? 保羅曰, 何物能絶我於主之愛乎? 孔子之守死善道, 亦此意也. 猶大怨婦之注膏, 主責之, 猶大有始有反心, 愛金而不愛主, 亦錯之甚, 今看世之罪惡, 皆由金錢, 子怨父母, 人斥朋友, 臣賣國家, 皆由此也, 錯之甚矣. 古語曰 毫釐之差, 千里之謬, 人誰不愛金錢乎? 愛金亦不爲罪, 然愛無眞理故耳. 愛是美德, 然其中有錯, 故不爲美德. 玉雖燁然有光, 然其中有瑕, 則不爲全寶. 愛誠有力 如參孫, 然一惑于妖女, 一髮無力, 死于非理, 斯今不看大圍(다윗)乎? 大圍誠無罪之愛, 以眇然一少礫, 殺골이앗大將, 足証愛之有力, 無愛則不能勝自己, 况克罪乎? 今人愛民族愛國家, 誠可款也. 然無眞理故可嘆耳. 張作霖恒言, 保國安民. 而內實賣國 故皆斥之, 世之假愛皆如掩耳盜鈴, 盡不可信也. 今看바리새人之愛主, 當獻父母者, 曰 我獻于主, 則不獻父母亦可云, 是誠고르반, 今之信者, 皆如바리새人, 外雖信仰, 內實不信, 或信者中 一以抗父母爲主, 父是頑古不信, 子當陳父使信可也. 反爲抗父而不孝, 一無誠意, 或日日祈禱, 得信之力云, 而看其言行, 反不如信者, 此則以祈禱爲信之事而已, 則何者勝於바리새人乎? 錯之甚矣. 主曰 愛人如愛己云, 今人愛己何爲也? 以美食美衣, 主於富侈, 是可愛己乎? 是反害己. 雖常惡衣惡食, 以主之愛爲衣, 愛喫山棗, 不如稻粱可也, 愛喫稻粱, 反不如山棗, 是誠錯誤. 愛着布木, 不如錦繡可也, 愛着布木, 反勝於錦繡, 錯之甚矣. 今人愛己, 亦有錯誤, 吾人何者, 非錯誤乎? 吾之信德中, 務去錯誤可也. 某人日記, 有善紅惡黑之票, 日日査之, 黑多紅少, 故日以去黑爲務, 日克之然後, 紅點反多云. 吾人當爲務紅者可也.


지금 우리 종교의 도덕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믿음과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만일 종교에서 실천하고 몸소 행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믿음보다 먼저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주께서 또한 바리새인과 늘 충돌하게 된 것은 저들은 믿음을 위주로 하고 주님은 사랑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종교에서는 항상 말하기를 사랑이 혹 실수하여 정밀하거나(精) 거친데(粗) 따라 다른 이교도로 타락하는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사랑의 진리를 연구하여 마땅히 사랑을 좋아하고 불의를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위주로 하면 어린 아이처럼 될 뿐이오, 사랑을 위주로 해야 어른이 됩니다. 어린아이는 대추나 배를 부모에게 달라고 할 뿐이고, 대추나 배를 남에게 줄줄은 모릅니다. 밀실에 깊이 들어앉아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간혹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도 하고, 자책도 하고, 때로는 부르짖으며 울부짖기도 합니다. 그러나 넓고 탁 트인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나 물자가 모여들고, 만 가지 이치가 앞에 닥쳤을 때, 내 이 하찮은 몸으로 그것들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성낸 기운으로 나를 억누르려고 하여도 나는 깨끗하여 아무 일이 없는 것은 나에게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물질로 나를 상대하더라도 내가 꿋꿋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나에게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많은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는 옛날에 한 위인이 있었습니다. 아직 일이 성취되지 않았을 때 일찍이 밤에 사랑채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웃집에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답니다. 그러나 남자는 돌아보지 않고 독서를 하다가 드디어 책장을 덮고 이르기를 너, 가서 막대기를 가지고 오면 종아리를 치겠다 하니 그 여자가 막대기를 가지고 가벼렸답니다. 그 뒤, 그 여자는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지위가 높았고 독서하던 사람은 죄에 걸려들어 사형의 재판을 받게 되었답니다. 그때, 그 여자가 막대기를 가지고 그 아들에게 가서 지난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이 남자는 반드시 범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여 사면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사랑에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 회사의 형제 중 한 사람이 여러 해 동안 신용을 얻어 높은 자리에 쓰이게 되었고, 자신 역시 가난에서 벗어났으며, 또한 주인에게 믿음을 받아 온 집안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원 한 사람이 돈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게 비록 하찮지마는 새해를 맞는 선물입니다. 혐의하지 마시고 받아주십시오 하자, 대답하기를 내가 너를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이것을 반드시 받지 않겠다라고 하고 돌려보내었습니다. 그 뒤에 또 20금을 가지고 자신이 없는 틈을 타서 그 부인에게 주고 갔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이르기를 이 돈은 아무개가 가지고 왔는데, 새해 선물이라고 합니다’고 하자, 대답하기를 받아서는 안 되니 돌려 줍시다라고 했으나 부인은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요 하였습니다. 그 뒤에 사장이 그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가 어떤 사람의 뇌물을 받았는가?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장이 돈 준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생각하니 바로 그 새해 선물로 (歲儀)로 준 돈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롭지 못한 걱정거리로써 뒷날 반드시 탄로가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진리가 있는 것인데, 이 일은 참된 진리와 멀었으므로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하여 늘 착오를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집에는 병기(兵器)가 있다라고 하셨는데, 부자간에도 병기가 있고, 모녀간에도 병기가 있으며, 고부간에도 병기가 있습니다. 이 병기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잘못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신문을 읽어보니, 패륜의 남자가 어머니에게 글을 보내어 형에게 돈을 달라고 협박하였으나 형이 주지 않자 칼을 품고 들어가서 그 어머니와 형을 마구 찌르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 역시 잘못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패륜의 남자는 어머니와 형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금 돈을 사랑하고 형과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잘못된 착오가 심한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자식을 안고 사랑하여 좋은 것 먹이고, 좋은 옷을 자식을 위하여 베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자식이 만일 부모의 자식 사랑 십 분에 둘만 나누어 그 부모에게 돌려주어도 마땅히 효자라고 이를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에 대한 착오가 이로써 증명됩니다. 그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그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는 것도 역시 착오입니다. 그런데 돈을 그 아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는 새나 짐승만도 못 합니다.


내가 일찍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정절부인이 양자를 들여서 사랑으로 키우고 또한 잘 가르치기 위하여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보내느라고 이 부인은 바느질과 방아품 그리고 세탁까지 하며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식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맞이하고, 그 자식이 집에 돌아온 뒤에는 또 품 팔러 나가서 일을 하며, 반드시 영광을 얻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식이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왔는데 마을에 들어서서 그 어머니가 남루하게 차려 입은 채로 맞이하자, 아들의 친구가 묻기를 저 아주머니가 자네하고 어떻게 되니? 하자, 아들이 대답하기를 이웃에 사는 늙은 노파일세 하였답니다. 이 자식은 명예와 학위를 사랑하고, 그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니 착오된 것이 심한 것입니다.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신앙을 금지했는데, 이 며느리는 친정집에 있을 때 독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집간 뒤에 시집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으므로 금한 것입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오래도록 시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허락하여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네가 신앙을 가지면, 내가 죽은 뒤에 제사도 지내지 않을 것이고, 네가 신앙을 가지면 이웃에 창피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어머니는 죽은 뒤에 허무한 제사를 지내주기를 좋아하여 꼭 금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함께 음식도 먹지 않고 내어 쫓으려고 하니, 그 며느리는 겨울에 간혹 주방에서 자기도 하면서 시어머니를 원망하지 않고 극진히 효도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하여 신앙을 허락하게 되니 며느리는 이 집안에서 어둠속의 등불과 같았습니다. 온 집안이 감동되어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그 뒤에는 온 마을이 믿게 되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강화군 초지(草芝) 마을에 있었던 일로 이 며느리의 사랑은 가히 그릇 되지 않은 진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비록 주님을 믿더라도 이 며느리처럼 인내를 가지고 진정으로 지키는 사람은 드뭅니다. 믿었다가 끊었다가 하기를 일정하게 하지 못하여 결과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만일 진정으로 하는 사랑이 있다면 어떤 물건이 능히 방해하겠습니까? 바울이 무엇이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하였습니다. 공자님이 죽음으로써 좋은 도를 지키라고 한 것도 역시 이러한 뜻입니다.

유대의 한 부인이 기름 부은 일에 대하여 원망하자 주께서 책망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처음부터 반대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돈을 좋아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니 역시 착오가 심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죄악을 본다면 모두 금전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고, 사람이 벗을 배척하고, 신하가 나라를 팔아먹는 것도 다 이것 때문이니, 착오가 심한 것입니다.

옛말에 애초에 털끝만큼의 차이가 마침내 천리나 멀리 어긋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누가 금전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금전을 사랑하는 것도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랑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바로 미덕입니다. 그 중에 착오가 있기 때문에 미덕이 되지 못합니다. 옥이 비록 번쩍번쩍하는 광채가 있으나 그 가운데 티가 있으면 온전한 보배가 되지 못합니다.


사랑은 진실로 삼손과 같이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요녀에 유혹 당하여 머리털 하나로 무력하게 되자 비리(非理)에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다윗을 보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실로 죄가 없는 사랑을 가졌으므로, 조그마한 물매돌 하나로 골리앗 대장을 죽였으니 사랑이 힘이 있음을 충분히 증거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자기 자신도 이길 수 없거늘 하물며 죄를 이기겠습니까?


오늘 날 사람들이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 실로 정성스럽기는 하지마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가히 한탄스럽습니다. 장작림(張作霖)(청나라 말년 장군)이 말하기를 보국안민(保國安民)한다는 사람들이 내면적으로는 실제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이므로 모두 배척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거짓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귀 막고 종을 도둑질하는[엄이도령掩耳盜鈴] 자들과 같으니 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부모에게 드릴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내가 주님께 드렸습니다 하고 부모에게는 드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고르반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요즈음의 신자들도 모두 바리새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자이지만 안으로는 사실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간혹 신자 중에는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을 가지고 주님을 위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완고하여 주님을 믿지 않더라도 자식은 마땅히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여 믿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것은 불효이고, 또 한 가지는 성의가 없는 것입니다. 간혹 날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신앙의 힘을 얻는다고 하나, 그 사람의 언행을 보면 도리어 신자와 같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기도를 가지고 주님을 믿는 일로 생각할 뿐이므로 무엇이 저 바리새인과 다르겠습니까? 잘못됨이 큽니다.

주께서 이르기를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고 하셨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기를 어떻게 합니까? 좋은 음식과 좋은 옷으로써 부자의 사치를 주된 일로 삼고 있으니 이게 자신을 옳게 사랑하는 일입니까? 이는 도리어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늘 해진 옷 거친 밥을 먹어도 주님의 사랑으로 옷을 입고 산대추를 잘 먹되 쌀과 기장만 못한 것이 맞습니다. 쌀과 기장을 즐겨 먹으며 도리어 산대추만 못하다고 하는 것은 실로 잘못 된 착오입니다. 무명베를 즐겨 입되 비단에 수놓은 것만 못한 것이 맞습니다. 무명베옷을 즐겨 입으며 도리어 비단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큰 착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데도 역시 착오가 있으니, 우리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착오가 아니 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덕목 중에 착오되는 것을 힘써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기 중에 선(善)은 붉은 색으로, 악(惡)은 검은 색으로 표시한 것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조사하여 보니 검은 색이 많고 붉은 색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검은 색을 버리는 것으로 임무를 삼아서 그렇게 극복한 뒤에는 붉은 점이 도리어 많아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붉은 색을 힘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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