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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2)

32. 뒤를 돌아보지 말라(勿顧後) / 누가복음 9장 끝


서강(西江), 체부동(體府洞)


主設此喩者, 暗示前進勿退, 執耒農者也. 世人目之爲退步事, 而 主曰 農者亦有天國, 當時猶人以祭祀及書記等, 爲進步的事業, 而特以農業, 爲下層事業甚誤解. 主曰 執耒者不顧後, 則可入天國, 故天國在上不在下, 在前不在後, 在進不在退, 從主者與農者 彷彿, 世人特以爲退步, 而信道有無限進步, 勿爲顧後可也. 今顧後者何也, 今以本章所記者言之, 亦可知其一班矣. 主山上變化, 使門徒, 抱不少之希望, 而山下之門徒數人, 互相紛爭, 不恤病兒, 此紛爭, 欲矜己也. 使病兒, 爲矜己之物, 只顧自己, 不恤病者, 更不恤弱者, 此甚退步事也. 故主責之曰, 無信乎, 悖逆者乎, 爲醫者而欲進步則不然, 對病者不思自己, 只思病者, 我醫此病者, 必有名譽云則不可. 失敗之源, 比如講者幾講畢, 而思講畢則着桂冠云. 故失敗矣. 門徒對病者祈禱, 而反如康, 醫不能成功. 主曰勿顧後, 其後不信之人, 以主名行事, 門徒禁之, 暗生猜忌. 主道皓如日月, 無所不照, 人不可私有, 主責之曰 爾以道爲專有乎? 道不可專有, 爾何私之乎? 公物私有, 退步也. 猜視他人, 亦退步之一事也. 猜從何來也? 出於私專, 出於排他. 排他與私有, 常常竝行, 此兩種惡法, 充滿社會, 滅亡乃已. 見他人之金多, 以爲彼人, 不可有此金, 而何可有之乎? 故我國有興甫老甫之歌, 猜忌之大障碍也. 甲論乙駁, 善何從生也? 一人有進步, 則酷看其人之短處, 期於打倒, 今日淸國是也. 欲進步則猜忌一掃, 社會淸明後可也. 其後主過살마리아, 요한 야곱 且從之, 有一里不納吾主, 門徒怒甚, 欲降火滅之, 是時門徒學主愛人之道, 而以人不從己, 反欲滅之, 是上古變道也. 昔趙高, 欲識不從己者, 持鹿問於人, 曰 是何物也? 或畏高故言馬, 或異高故直言鹿, 高目陰中諸言鹿者以法, 是小人陷人之道也. 進步之人, 豈如是乎? 故主不從門徒之言而避之, 世人皆不從. 主至釘十架, 主已知之. 豈以一里之不從, 蘧反滅之乎? 故主不惡報, 以德報怨, 世人皆抗主, 主不怨, 反以身已贖其罪, 知者甚少, 知此者, 乃信徒也. 今日朝鮮社會, 有一惡風, 揭載新聞, 至有睚眦之怨必報, 九歲小兒 殺三歲小兒, 皆欲惡報, 人心之惡, 何至此也? 主憎此, 不從門徒之請, 前已言之. 黑人善報白人之言, 世人欲殺主, 主至釘死, 不發惡, 反爲彼祈禱, 曰 主乎! 赦彼之不知也. 其後又設狐鳥之譬, 而示以從道之急, 急於葬父母. 當疾走不後也. 不可如롯之顧後 又可以色列之出埃及. 埃兵追後, 豈可有顧後之暇乎? 後有死亡, 前有生命. 當望火柱雲柱而疾走也. 東洋以顧後爲主, 謳歌前人前賢前聖屬己 不望後人後賢後聖也 只望過去, 不望未來也. 故孔子 憲章文武, 祖述堯舜, 以集大成爲聖人. 此非不美, 然只談定滅而已也. 人以前人爲聖人, 事以古事爲鑑, 國以古國爲法, 破此則爲叛逆也. 尹虧略改朱子之吐解, 卽爲斯門亂賊, 處于極刑, 此何妄擧也, 此皆顧後之弊也. 又言朝鮮人之顧後, 賣先祖之白骨, 子孫世襲, 甚求名山, 葬祖先之白骨則受福云. 由此階級截然, 在下者有口無言, 有名祖而後, 子孫登于仕籍, 此法自宣祖始, 其前有三奴八吏, 從此而弱肉强食, 在下者不敢言, 而有敢言則捉去奪功, 官無息訟之日, 民衆魚肉而已也. 且山訟日日不絶, 數百訟民, 日日登庭者, 皆山訟也, 此皆顧後之弊也. 自甲午以降, 此等弊瘼, 雖云革破, 然弊而復弊, 一弊纔去, 一弊又來矣. 猶大人, 以黨亡國, 有酒利寒黨, 有沙斗皆黨, 有書記黨, 有헤롯黨, 有稅吏黨, 皆不統一, 散如亂麻, 互相排擊, 此時外人, 乘隙滅之, 只知前日之黨, 而不知新天國之終息也. 有人少犯安息, 則 石擊殺之, 少改聖經書字畫, 則以違法處之, 人不能措手, 無割禮, 視以異黨, 不與同坐, 甚矣! 猶人之顧後也. 今敎會之內, 不無此等弊習, 古制不可變也, 呈卷禮式及洗禮式, 幷不可變也. 禮拜順序, 不可變也. 主祈禱文不可不誦也, 使徒信經, 不可不誦也. 自給錢不可變也, 違此則非敎會云, 甚至於敎堂, 非洋制則非敎堂, 敎人之日常深刻錯誤, 不可猝變也. 至對不知草木之幼年而說上帝, 對日用之物, 亦不能知者而說天國之奧. 以迂闊而欲改編敎標則大驚小怪. 反此則視以異端. 黃海道有金章河牧師, 見逐于敎會云, 至解聖句, 亦甚拘泥不通, 主曰 勿但以餠生, 以神言生云, 故皆云勿求腐粮, 只求永生, 咀呪肉身, 欲美聖神, 故 言肉身則罪視之, 今朝鮮人, 不知餠生之道, 只知神生之道, 前某牧師, 累日不食飢甚, 而說敎中倒下壇上云, 甚爲矜惻. 此朝鮮敎友誤解也. 某敎友, 不農不織, 而恪守禮拜, 善則善矣. 其於腹空何? 今朝鮮人之經濟, 一視墮落, 而至敎人尤甚者何故也? 卽咀呪肉身故也. 今聖句解釋, 如此誤解, 江華鳳笙村, 經濟甚足, 生活無憂, 然無靈的機關, 故人多墮落, 飮酒不良, 主於此等人, 訓之曰 不但騈生, 以神言生也. 無經濟之人則不然, 當戮力辦物, 使自家安保, 乃爲敎友之職也. 敎友而不顧父母非孝也, 敎人而不顧妻子非仁也. 敎人卽不務農畜非道也. 但誤解經訓, 而不務生活則不可也. 信者不關世事, 因爲敎訓, 甚至何敎人, 自幼奠祈禱, 使子只學나틘말, 不習英語, 故見斥于當世, 世人甚笑, 何人不知國家, 但知天國, 歸國之, 如要旅券則不許, 甚矣 顧後之弊也. 一切以世事爲魔鬼之事而排之, 則吾人何可生活乎? 然但不可專心世事, 不知神之事, 則甚危險矣. 僉位念之哉.


주께서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것은 진보하여 앞으로 나아갈 뿐이지 퇴보하여 뒤로 물러가지 말라는 교훈을 암시한 것입니다.

쟁기를 잡은 자는 농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농사를 퇴보하는 일이라고 지목하기 때문에 주께서 이르기를 농사는 하늘나라의 일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제사나 서기 등의 일을 진보하는 사업으로 여겼고, 특히 농업은 하층사회의 사업으로 심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주께서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인 천국은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않으며, 앞에 있고 뒤에 있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있고, 뒤로 물러가면 없으니, 주님을 따를 자는 농사짓는 자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특히 퇴보를 하고 있으나 신자들은 무한 진보를 해야 하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됩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본장의 기자가 그것을 말한 것처럼 역시 그 한 부분을 알 만합니다.


주님의 산상에서의 변화는 제자들로 하여금 적잖은 희망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있던 제자 두어 명은 서로 다투느라 병든 아이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 분쟁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하여 병든 아이까지도 자신을 자랑하는 물건으로 여겼으니, 다만 자기만 돌보았을 뿐 병자도 보살피지 않고, 다시 약자도 돌보지 않았으니 이는 매우 퇴보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믿음이 없는 자여! 패역한 자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의원이 된 자가 진보하기 위하여서는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니, 병자와 상대할 때는 자기를 생각지 말고, 다만 병자만 생각하여야 합니다. 내가 이 병을 고치면 반드시 명예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 그것은 옳지 않으며 실패의 근원이 됩니다. 강연을 하는 사람이강연이 끝나면 월계관을 씌워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병자를 보고 기도하면서 건강한 사람에게 하듯 하면 병을 고치는 일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자, 그 뒤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주의 이름으로 행사에 힘쓰니, 제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금한 것은 모르는 사이에 시기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주님의 도는 밝기가 해와 달 같아서 비치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혼자만 가질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책망하시기를 너는 진리의 도를 너 혼자 가지려고 하느냐? 도라는 것은 혼자만 가질 수 없는 것인데 네가 어찌 사사로이 가지려고 하느냐 하였으니, 공적인 물건을 사적으로 가지는 것은 퇴보입니다.

남을 시기하는 일도 역시 퇴보하는 한 예입니다. 시기는 어디서 옵니까? 혼자서만 가지려는 사유심에서 나옵니다. 남을 배척하는 배타심에서 나옵니다. 사유나 배타는 항상 같이 다닙니다. 이 두 가지 악법이 사회에 충만하니 멸망하고 나야 그칠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저렇게 많은 돈을 가질 수 없는데, 어떻게 저리 많이 가졌는가 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흥부와 놀부 노래가 있는데, 시기는 바로 진보에 큰 장애를 됩니다. 어떤 의견이 나오면 금새 반박하여 갑론을박을 하니 착한 마음인 선(善)이 어디서 나옵니까? 어떤 사람이 진보하는 일을 하게 되면 바로 그 사람의 단점을 찾아내어 기필코 거꾸러뜨리려 하는데 오늘날 청국(淸國)이 그러합니다. 진보를 하려면 시기하는 마음을 씻어버리어 사회가 밝고 깨끗해진 뒤라야 됩니다.


그 후, 주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때, 요한과 야곱이 또한 따라 갔습니다. 어떤 마을에서 주님을 영접하지 않자 제자들이 매우 화가 나서 불로 멸망시키자고 했는데, 그때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도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으니 도리어 멸망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변질된 도입니다.

옛날 중국 진시황이 죽고, 조고(趙高)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알아내기 위하여 사슴을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묻기를, 이게 무슨 짐승이오? 하자, 어떤 이는 조고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일부러 말(馬)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조고의 말과 달리 사슴이라고 바로 말한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조고는 말이라고 한 자들을 몰래 지목해 두었다가 법으로 덮어 씌워 처형하였습니다. 이것은 소인배가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도입니다. 진보하는 사람이 어찌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멸망시키자는 말을 듣지 않고, 그 마을을 비끼어 가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고, 주님은 그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어찌 한 마을이 따르지 않는다고 도리어 그들을 멸망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덕으로 원수를 갚았습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주님께 저항하여도 주님은 원망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죄를 자신의 몸으로 속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이는 매우 적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신도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조선 사회는 악한 풍속이 있어서, 신문에 실린 내용을 보면 아주 조그마한 원한도 반드시 갚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보기로 9살 어린이가 3살 어린이를 죽였다고 합니다. 모두 이렇게 몹쓸 보복을 하고 싶어 하니, 인심의 험악함이 왜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미워하여 제자들이 그 마을을 멸망시키려는 것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 언급하였습니다. 흑인이 백인에게 선으로써 갚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살해하려고 하여 주님께서 못 박혀 죽음에 이르렀으나 주께서는 악한 말을 하지 않고 도리어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는 또 여우와 새에 비유하여 도를 따르는 것이 급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급하면 마땅히 뒤 떨어지지 말고 빨리 달려가야 합니다. 롯과 같이 뒤를 돌아보면 아니 되고, 또 이스라엘 애굽에서 나오듯 해야 합니다. 애굽의 병사들이 뒤를 쫓아오는데 언제 뒤를 돌아볼 여가가 있습니까? 뒤에는 죽음이 있고 앞에는 삶이 있으니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바라보며 달려가야 합니다.

동양 사람은 뒤돌아보는 것을 위주로 생각하며 옛 사람과 옛 현인과 옛 성인 등속을 찬양 구가하면서도 자신의 뒤에 올 사람이나 현인이나 성인은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만 바라보고 미래는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문왕과 무왕의 법도를 지키고 요순의 업적을 기술하여 집대성한 성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아름다운 일이 아님이 아니나 다만 멸망할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

사람은 이전 사람을 성인으로 삼고, 일은 옛 일을 거울로 삼으며, 나라는 옛 나라를 법으로 삼되 만일 이 규칙을 깨면 반역이 됩니다. 윤휴(尹虧)는 주자가 달아놓은 토(吐)와 해석을 조금 고쳤다가,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몰려 극형(極刑)을 받고 죽었습니다. 이 얼마나 망령된 거사입니까? 이 모두 뒤만 돌아본 폐단입니다.

또 조선인이 뒤를 돌아본 일을 말한다면 선조의 백골(白骨)을 파는 일입니다. 자손은 조상의 지위를 세습(世襲)으로 이어받고, 명산(名山)을 구하여 선조의 백골을 장사지내면 복을 받는다고 이릅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랫사람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합니다. 이름난 조상이 있어야 자손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이 법은 선조(宣祖)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천민계급으로 삼노팔이(三奴八吏)가 있었는데, 이로부터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되어 아랫사람은 감히 말도 못했습니다. 말을 못하게 되니 강한 자가 잡아가고 이루어 놓은 공도 빼앗아갑니다. 그리하여 관청에서는 송사가 끊일 날이 없어서, 힘없는 민중은 강한 자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무덤으로 다투는 산송(山訟)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송사하는 백성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관청에 올라오는데 모두가 산송들입니다. 이게 모두 뒤를 돌아보는 데서 오는 폐단입니다.


갑오경장이후로 이런 폐단이 비록 혁파되었다고 하나, 폐단은 다시 폐단을 만들어내어 한 가지 폐단이 겨우 없어지자마자, 또 다른 폐단이 뒤 따라 옵니다. 유대인은 당파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는데, 그 당파 중에는 바리새 당, 사두개 당, 서기 당, 헤롯 당, 세리 당 등이 있어서, 모두 한 덩어리로 뭉치지 않고, 얽힌 삼실처럼 흩어져 있으며, 서로 배척하고 공격하였습니다. 이 때 이방인이 틈을 타서 유대인을 멸망시켰습니다. 다만, 전 날의 당이 있는 것만 알고 새로운 천국의 종식(終息)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금만 안식일을 범하면 돌로 쳐서 죽이고, 성경에 쓰인 글자를 조금만 고쳐도 법에 어긋났다고 처단하게 되니 사람들이 손을 쓸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할례당은 다른 당파라고 하여 함께 앉지도 않으니 심하기도 하지요. 유대인이 뒤만 돌아보는 것을 보면, 지금 교회 내에도 이러한 폐습이 없지 않습니다. 곧 옛날의 제도는 변경해서는 안 되고, 장정과 예식, 세례식도 아울러 변경할 수 없고, 예배순서도 바꿀 수 없으며, 주기도문도 외지 않으면 아니 되고, 사도신경도 외지 않으면 아니 되고, 자급전(自給錢)도 변경할 수 없으니, 이를 어기면 교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교회당도 서양제도가 아니면 교회당이 아니라고 하니, 교인의 일상이 심각하게 착오되어 있어서 갑자기 변경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무나 풀들을 보아도 무엇인지 모르는 철부지 어린 나이에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물건들을 보고도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천국의 오묘한 이치를 설명하려 합니다. 이렇게 실제와 맞지 않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가지고 교회의 목표를 개편하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하여 반대하게 되면 도리어 이단으로 몰려고 합니다.

황해도에 김장하(金章河)라는 목사가 있었는데 교회에서 쫓겨났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구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아주 막히어 통달하지도 못하고, 주께서 이르시기를 다만 떡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라라고 한 데 대하여 모두 썩은 양식은 구하지 말고, 다만 영생을 구하도록 하라고 하며 육신을 저주하고 성신을 미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육신을 말 할 때 죄인처럼 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조선 사람은 떡으로 사는 방법은 모르고 다만 하나님 때문에 사는 도리만 알고 있습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이 여러 날 음식을 먹지 않다가 너무 굶어서 설교 도중에 단상에서 쓰러져 넘어졌다고 합니다. 매우 안타깝고 측은한 일입니다. 이것은 조선 교우들의 오해입니다. 어느 교우 한 사람이 농사도 짓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으며 정성스레 예배만 지키어 올렸다고 하니 잘 한 일은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가 비어 고픈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조선인의 경제는 뒤떨어져 있습니다. 교인들에 있어서는 더욱 심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바로 육신을 저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경의 구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이 오해한 것입니다.


강화도 봉생촌(鳳笙村)은 경제는 매우 풍족하여 생활에는 걱정이 없으나 영적 기관이 없어서 많은 사람이 타락하여 술을 마시고 불량한 데 빠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경제에 풍족함이 없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죽을 힘을 다하여 물건을 마련하여야 자기 집을 편히 보전하는 것 이것이 교우의 직책입니다. 교우가 되어 부모를 돌보지 않으면 불효가 됩니다. 교인이 되어서 처자를 돌보지 않으면 어진 일(仁)이 아닙니다. 교인이 되어서 농축산 일에 힘쓰지 않으면,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생활에 힘쓰지 않으면 옳지 못합니다.

신자는 세상사를 관계하지 않는 것으로 교훈을 삼아, 심지어 어느 교인은 어릴 때부터 기도만 드리고, 자식에게는 라틴어만 가르치고, 영어는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그 당세에 배척을 받아서 세상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국가라는 개념을 모르고 다만 천국만 알기 때문에 자기 나라로 돌아왔을 때 여권(旅券)을 요구하는 일도 허락지 않았으니, 옛 것만 돌아보는 폐단이 너무 심합니다. 이런 이는 일체의 세상일을 마귀의 일로 여기어서 배척하게 되니 우리 사람들과 어떻게 생활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다만 세상 일만 전심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몰라도 매우 위험합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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