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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2)

31. 몸을 쳐셔 복종케 / 고린도전서 9:27


체부동(體府洞). 상동(尙洞). 1929.11.10.


耶蘇以釘殺身後, 西洋有各種敎派, 其中有一怪派, 卽鞭撻敎也. 鞭撻者鞭其身, 使有苦楚, 卽克欲之一端也. 故保羅曰 擊其身也, 擊其身而後, 有何所得乎? 將軍擊敵勝之則必有勳功, 吾人擊身必有所得. 孔子曰 殺身成仁, 殺其身而必成仁者儒敎之大義. 故東洋成仁之人不遑枚擧, 而必皆困苦其身, 非困苦則必殺死其身也. 夷齊欲得淸廉, 必不食而死, 句踐欲得國必嘗膽而臥, 以其成目的必犧牲其身也. 故曰擊身, 岳飛曰 山中敵易破, 心中敵難破云. 故敵不在山中, 必在心中. 保羅曰 我不欲爲人奴, 而必爲奴者, 必得奴也. 我不欲作無法人, 而爲無法人者, 必欲得無法人也. 我不欲爲弱者, 而爲弱者, 必欲得弱者故也. 此皆擊身之工夫也. 此身驕傲, 欲坐上座, 欲人榮我, 人普通心理也. 反降而爲奴云, 則豈人之所欲乎? 然我有救人歸道之心, 而爲奴則身雖降下, 其心甚高, 用盡得人之道, 則人必歸道, 我亦自着矣. 若無救人之心以爲奴, 則奴以爲也. 故不可不察箕子佯狂爲奴, 然誰言箕子奴而已乎? 必稱聖人也. 明太祖欲得天下, 先作乞人, 以太祖之雄, 降作乞人, 豈其本心乎? 然欲得天下, 甘心爲乞人, 故今日耶蘇敎, 必要于勞働者, 今勞働者不得其位, 心甚不平, 慰彼者果誰也? 今言農村傳道之必要, 而傳道人若不降下其心身, 則不能傳道. 今言爲奴者, 則雖不爲身僕, 而有金錢之奴, 有名譽之奴, 有權力之奴, 此等不自由者, 一聞其理, 必皆放釋, 主卽解放之先驅者, 故眞理解放最有力, 國欲政權而雖爲解放, 其自由必不久, 以眞理解放, 則永世自由也. 其次爲無法人, 無法必發展無禮, 詩曰 人而無禮, 胡不遄死. 此甚惡其無禮而言也. 然此世有禮之人甚少, 無禮之人甚多, 倒言則此世着高帽禮服者, 果幾人, 着高帽, 不能入商店, 又不能入料理店, 上下截然, 不可相親, 今保羅脫學者之衣, 又脫베냐민(便

雅憫 : 바울의 민족 조상)之禮服, 入無禮無法之衆中, 豈保羅之心哉? 然擊身降下, 反作無禮人者, 欲得無禮人故也. 今人無職, 欲曳人力車而不能者, 古不欲擊身, 昨年家兒無職, 欲曳行구루마 壹臺, 而不能者, 亦不擊身故也. 今年老無力, 扶杖僅行者, 已無可論也. 年富力强之靑年, 宜效保羅而行之可也. 彼異邦之人, 不知여호와 又不知聖經, 其生活皆無法, 又無知識, 向上無望, 故主離天堂脫神子之衣, 而降作罪人, 與罪人爲友. 톨스토이 辭伯爵之貴, 又出數千萬円之金, 而欲知農奴之形便, 甘與彼同處, 彼亦人也, 我亦人也, 一人而已. 露西亞之革命, 何莫非由彼也. 今所謂有禮之人, 皆不合大衆, 位高而金多, 與蓬頭突鬢, 有何相關也. 故降志擊身, 反作無禮之人, 而救其人也. 今之敎人如劣泅之人, 救人而自沒也. 人見人溺水, 而投入水中, 欲救其人而自不知泅水, 故漸次入水, 非但不能救人也, 己亦深入水中, 而不能出也. 豈不悲哉! 其次爲弱者也, 弱者無力也. 無力則不能勝世, 不能克己, 不能救人, 世之帝王以腕力, 能克敵, 能殺人, 能奪國, 而主則殺身而成其目的, 爲罪人釘于架上, 不堪盜刀之刑, 而能爲猶大之王乎? 以外觀看之, 則似至無力無能無權, 而能以十架勝全世之罪, 豈不偉大乎? 故主之力以弱而成也. 故基督敎人之力, 在于弱也. 李粒落地, 似無生命, 然其發芽結實, 則甚有力. 聖者復起, 死者復活, 弱者復强, 基督之生命也. 風來無遮而及其有力, 能揚海覆舟, 水流甚弱而及其有力, 能成大海也. 故基督敎人之力, 在于弱也, 故主曰 勿拒小兒, 勿使小兒, 犯罪如石係頸而浸海也. 故欲得弱者, 則反爲弱者而得也. 今世不欲得弱者而欲滅弱者也. 如虎在山萬獸畏襲者, 以其虎食其獸故也. 以欲食而欲得, 故弱者不敢得近强者也. 主在罪人叢中, 與之食與之友與之言與之交, 主之心胸何嘗忘弱者乎? 我朝肅宗時代, 欲知民間之疾苦, 脫御衣而徒步, 之民間幸行, 以不欲顯王者之態者, 以欲得民也. 昔蘇軾至司馬光家, 光不在, 問其僕主何在, 僕曰君實乎? 軾大責曰 僕何呼主名乎? 後當以大監稱之, 光還聞其僕稱大監, 問其故, 俄者東坡責而改稱, 光曰 好好. 一作誤東坡壞云. 光之得不如此也. 猶人之社會, 癩病之人, 人不相從, 而主手捫之卽潔, 犯淫之女不相從, 而主數之曰 更勿犯罪, 使之得潔云. 稅吏 人皆賤視, 而主不棄用之, 此皆爲弱者之証也. 以上保羅之爲奴僕, 爲無法人, 爲弱者云者, 皆擊身之工夫也. 吾基督敎非鞭撻敎也. 而鞭撻其身, 使陷困難, 完去己私則一也. 基督敎殺身成仁如儒敎, 而其最有力者主之聖血也. 主曰 爾克罪, 不至流血云, 克罪當流血, 此必然之事也. 且爲他人之罪亦流血, 如主在十架流血也. 己雖無罪而無可流血之任, 悲人有罪而必亡, 代爲流血而死, 豈不偉哉! 彼不自由而爲人奴僕者, 又無知識而無禮法者, 又無權利而靈肉綿弱者, 皆人間之大不幸也. 主入其中使之向上, 而欲實行此道, 則非擊身不可也. 擊身之方, 忍耐爲主, 忍耐非易, 易人向我曰 奴乎無法乎無力乎, 則能安而受之乎? 必勃然變色, 故忍之爲難. 其次信仰爲主, 主如此敎之, 故我學之, 不學則已, 學之則學主, 擊身非但擊身, 擊其家族, 擊其門徒, 擊其民族也. 如是而後可得衆也. 吾等當擊身從主, 勉之勉之!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서양에는 각종 교파가 있는데 그 중에 괴이한 종파가 하나 있으니, 바로 편달교(鞭撻敎)입니다. 편달이란 자기 몸을 채찍질 하여 고초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곧 욕심을 극복하기 위한 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 몸을 치라고 하였으나, 자기 몸을 쳐서 무슨 소득이 있습니까?

장군은 적군을 쳐서 이기면 반드시 공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치면 반드시 소득이 있습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자신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는 것은 유교의 대의(大義)입니다. 그렇게 하여, 동양에서 인을 이룬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반드시 모두 자기 몸을 괴롭혀야 합니다. 그렇게 괴롭히지 않으면 반드시 자기 몸을 죽여야 합니다.


백이 숙제는 청렴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먹지 않고 죽었으며, 구천(句踐)은 나라를 얻기 위하여 짐승의 쓸개를 맛보며 누워 잤다고 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자면 반드시 그 몸을 희생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을 치라고 한 것입니다. 송나라 장군 악비가 이르기를 산중에 있는 적은 이기기 쉽지만 마음속의 적은 이기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적은 산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속에 있습니다.


바울이 이르기를 나는 남의 종이 되기를 싫어하지만 종이 된 자는 반드시 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무법인이 되고 싶지 않으면서 무법인이 된 자는 반드시 무법인을 얻고 싶어 한 것이고, 내가 약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서 약한 자가 되면 반드시 약한 자를 얻고 싶어 한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 자신의 몸을 쳐서 학대하는 공부입니다.

이 몸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고, 남이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사람이 가진 보통 심리인데 도리어 자신을 낮추어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찌 사람이 하고 싶은 바이겠습니까? 그러나 남을 구원하여, 사람이 지킬 도리에 돌아가게 하는 마음으로 종이 되었다면 자신의 몸이 더 아래로 내려가더라도 그 마음은 매우 고상하여 질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를 다 하게 되면 남들도 다 그 도에 돌아갈 것이고 나 역시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을 구원하려는 마음이 없이 종이 된다면 그냥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주(周) 나라가 망한 뒤 기자(箕子)가 미친 체하고 남의 종이 된 것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누가 기자를 종일 뿐이라고 말합니까? 도리어 성인(聖人)이라고 일컫습니다.

명(明) 나라 태조가 천하를 얻으려고 할 때 먼저 거지노릇을 했습니다. 태조의 영웅적인 기상으로 거지가 된 것이 어찌 그 본심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천하를 쟁취하기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걸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날 예수교에서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마는 지금 노동자가 자신이 가질 자리를 얻지 못하여 마음에 불평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을 위로할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지금 농촌에 전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과 몸을 낮추지 않는다면 전도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록 신체적으로 종이 된 것이 아니더라도, 금전에 종이 된 자가 있고, 명예의 종이 된 자가 있으며, 권력의 종이 된 자가 있습니다. 이런 부자유한 것들은 그 이치를 듣게 되면 반드시 모두 풀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해방의 선구자로써 진리 해방을 하는데 가장 유력합니다. 나라에서 정권을 가지려고 하나 비록 해방이 되더라도 그 자유가 반드시 오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로써 해방을 한다면 영원히 세상에 자유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법인을 위하는 것입니다. 무법은 반드시 무례(無禮)에서 발전되는 것이니, 시경에 이르기를 사람이 되어 예가 없다면 어찌 빨리 죽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이는 무례를 아주 미워해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사람 중에 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고, 무례한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 이 세상에 높은 모자 쓰고 예를 갖춘 예복을 입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높은 모자를 쓰면 상점에 들어갈 수 없고, 또 요리점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래위로 단절되어 서로 친해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학자의 옷을 벗고, 또 베냐민 지파의 예복도 벗고 무례하고 무법한 사람들의 가운데 들어갔으니, 이것이 어찌 바울의 본심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몸을 쳐서 자신을 낮추어 가지고 도리어 무례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무례한 사람을 이해시켜 바로잡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직업이 없으므로 인력거라도 끌려고 하나, 할 수 없는 것은 미리부터 자신을 채찍질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 집에 아이가 직장이 없어 차(구루마) 한 대를 끌려고 했으나, 그렇게 못 한 것은 역시 자신을 채찍질 하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올해에는 늙고 기력이 없어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으니 더 이상 논할 것도 없습니다.


젊은 나이 힘센 청년들은 마땅히 바울이 걸어간 길을 본받는 것이 옳습니다. 저 이방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성경도 모릅니다. 그 생활에는 법이 없고 또 지식도 없으며 향상할 희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당을 떠나 하나님 아들의 옷을 벗고, 내려오셔서 죄인과 같은 몸이 되어 죄인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백작의 귀한 신분을 사양하고, 또 수천만 원을 지출하면서 농사짓는 노예들의 형편을 알려고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저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 똑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러시아의 혁명이 이것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소위 예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대중들과 화합하지 못 하고,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은 더벅머리 서민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몸을 낮추고 몸을 채찍질 하여 도리어 무례한 사람이 되어 가지고 그 사람들을 구원하여야 합니다.


오늘 날 교인들은 마치 수영에 미숙한 사람 같아서 사람을 구하려고 하다가 스스로 빠져죽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물속에 뛰어들어 그 사람을 구하려고 하나 스스로 수영을 할 모르므로 점차 물에 빠져들어 가니, 빠진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자기 역시 물속에 깊이 들어가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은 약자를 위하는 것입니다.


약자는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도 극복할 수 없고 남도 구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제왕이 힘으로 적도 이길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고, 나라도 빼앗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죽여서 그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도둑의 칼에 죽는 형벌을 견딜 수 없었으나 이것이 유대의 왕을 위하는 것이었겠습니까? 외관으로만 본다면 주님께서는 무력하고, 무능하고, 권능이 없는 것 같으나 십자가로써 능히 온 세상의 죄를 이기신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힘은 약한 것으로써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힘은 약한 데 있습니다. 오얏나무 씨가 땅에 떨어져서 아무 생명도 없는 것 같다가도 그것이 싹이 트고 열매를 맺으면 큰 힘이 있게 됩니다. 거룩한 자가 다시 일어나고, 죽은 자가 부활하고, 약자가 다시 강하여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바람이 불어올 때 막힘이 없으면 마침내 힘을 얻게 되어 바닷물이 솟구쳐 배를 뒤집어엎게 됩니다. 물의 흐름도 매우 약하지만 마침내는 능히 큰 바다를 만들어 냅니다. 기독교인의 힘도 약한 데 있으므로 주께서 이르기를 어린아이가 오는 것을 막지 말고, 어린아이를 부리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범죄는 마치 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도리어 약자가 되어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약자를 구하려고 하지 않고 약자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호랑이가 산에 있으면 만 마리 짐승들이 다 두려워하는 것은 호랑이가 그 짐승들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먹고 싶어서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약자는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의 무리 중에 있으면서 함께 먹고, 함께 벗하며, 함께 말하고, 함께 사귀었는데 주님의 생각에 일찍이 어느 때고 약자를 잊은 때가 있었겠습니까?


우리 조선 숙종시대에 숙종은 민간의 고통을 알고 싶어서 임금의 옷을 벗고 걸어서 백성들 모인 곳을 찾아다녔는데 임금의 모습을 숨기고 백성들의 뜻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옛날에 소식(蘇軾)이 사마광(司馬光)의 집에 찾아가서 그 집 종에게 주인은 어디 계시냐고 하니 종이 말하기를 군실(君實)을 찾는가요? 하자 소식이 크게 꾸짖기를 종이 어찌 주인의 이름을 부르는가? 다음에는 대감(大監)이라고 말하라 하였답니다. 사마광이 돌아오자 종이 바로 대감님’이라 부르니, 사마광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조금 전에 소동파(소식)가 와서 대감이라고 고쳐 말하라고 나무랐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마광이 말하기를 알았다고 했는데, 어떤 곳에는 아니다. 동파가 잘못 말하였다라고 했는데, 사마광이 얻으려고 한 것은 이 말이 맞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한센병[癩病]에 걸린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친히 손으로 만지자 곧바로 깨끗이 나았습니다. 또, 간음한 여자과도 상종하지 않았으나 주께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아라’ 타이르시고, 깨끗게 해 주셨습니다. 세금 받는 관리인인 세리는 사람들이 모두 천한 사람으로 여기었으나,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제자로 부르셨으니, 이것이 모두 약자를 위한 증거입니다.

이상은 바울이 종들을 위하고, 무법인들을 위하고, 약자를 위하라고 이른 것들입니다. 모두 자신을 채찍으로 치는 공부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편달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을 채찍으로 쳐서 곤란에 빠뜨림으로써 자기의 사사로움을 완전히 버리려는 점에서는 똑 같습니다.

기독교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것은 유교와 같으나 더 강력한 것은 주님의 거룩한 보혈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너는 죄를 이기려고 하면서 피를 흘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구나 라고 하셨는데, 죄를 이기기 위하여서는 마땅히 피를 흘려야 하니 이는 필연적인 일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서도 역시 피를 흘려야 함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죄가 없어서 피를 흘려야 할 의무가 없지만, 남이 죄를 저지르고 꼭 죽어야 할 때 주께서는 대신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어찌 위대하지 않습니까?

저 자유가 없으면서 남의 종이 된 자, 아무 지식이 없고 예법도 없는 자, 또 권리가 없어 영혼과 육체가 약하고, 쇠약하게 된 자는 인간의 큰 불행입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그 가운데 뛰어들어 그들을 향상시켜 주었으니, 이 도를 실제로 행동할 사람은 자신을 채찍질 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몸을 채찍질하는 방법에는 인내가 주장 되어야 합니다. 인내는 쉽지 않습니다. 쉽다고 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르기를 종이라든지, 무법하든지, 무력하다고 하면 능히 편안하게 받아드리겠는가라고 한다면, 반드시 얼굴색을 바꾸고, 발칵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는다는 것을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주를 향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이 가르치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배우려면 주님께서 자신을 채찍 당하신 것을 배워야 합니다. 몸만 채찍질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도 채찍질하고, 그 제자들도 채찍질하고, 그 민족도 채찍질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 뒤라야 가히 대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주님을 따를 것이니 힘쓰고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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