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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2)

22. 나의 믿음은 어디 있는가(我信何在) / 로마서 14:22


心之所之謂之志也, 志之所在謂之信, 信犧牲我知識, 使心志安于所在也. 人各有所信, 孔子曰 人而無信, 比如大車無軌, 小車無輗, 其何以行之哉? 人若無信必不能行. 吾人乘車, 可至釜山及義州, 吾心先有信, 故乘車也. 若無信心, 其何以行之哉? 我如無信, 人不能信我, 神亦不能信我. 人信我則可行世界, 神信我則可行天國, 故今論信, 有信心信德兩者, 信心者我之所依也, 信德者人之所依也. 孔子就德而言也, 非就心而言也. 能助我心者何也? 卽信也. 信無懼信無畏信無疑信無惑, 宣敎師都伊明善泳, 使其子學泳于海, 乳兒不知泳, 托其父之手, 或浮或沈皆無懼, 終日學泳而歸, 此何故, 但信其父之手能救自己, 故擎托不捨也. 其父能使其兒之心勇敢無敵也. 然則信之力大矣. 今言世人之信, 果在何處? 或在物資, 或在知識, 或在自己, 秦始皇築萬里長城, 建阿房宮, 王愷石崇富於天下, 而此人其信在物資, 然一朝亡國亡家, 亞力山大王(Alexander), 足迹遍天下, 自以爲天下無可當我者, 一朝不勝一盃之酒而死, 所謂自己云者, 不過草露泯滅無迹, 昔先知諭猶人, 曰 汝勿依埃及, 又勿依巴比倫云, 而猶人之心理出沒無常, 或依埃及, 或依巴比倫, 竟被擄于外國七十年而歸, 世事空空一無所事, 一無所恃, 吾人以爲有金則可生云, 此甚不然, 金不可以活人, 吾非排金者, 然金非活人之物也. 前日南大門通, 有一乞人凍斃, 探其懷, 則有一千円貯金通帳, 無强近之親, 此金乃屬國庫, 以此觀之, 金可能活人乎? 世人誤以信物爲生命之源, 今吾人之所信果何在? 古雅典市有一高僧說敎, 亞力山大王, 見曰 先生有何求? 我能與之. 先生曰 我無所求, 但有一求, 王曰 何也. 先生曰 王遮太陽于我, 請避之, 有此求而已, 遂不言. 其所衣木草之葉, 其所居乃大樹之腹. 大王曰 我不爲亞力山大王, 當爲彼先生云, 然則此先生之所恃者何也? 其心中如無所信, 能輕皇帝乎? 요한衣駝食淸, 居曠野而呼見希律之不義, 直言不諱, 希律惡而囚之死, 요한之所恃者何也? 其心中必有大於希律王者也. 古者巴蘭先知, 當猶摩戰爭之時, 摩王請巴蘭先知, 曰 汝呪猶人, 可與金玉滿室云, 巴蘭動之而往, 被驢阻之, 反而歸之, 此時巴蘭心中, 金錢爲大而無大於金者, 故如是失敗也. 今日以金侮人者, 以金奴人者, 以金驕人者, 豈能久乎? 主曰 汝寶所在處, 汝心亦在云, 此何意也? 寶者指信也, 信之所在, 無不犧牲, 金寶也, 知識也, 才德也, 無不貢獻. 今吾人之所貴者何也, 所拂者何也? 所貴有所拂, 古人貴其金玉, 往西域而還, 此地禁帶寶而歸, 故此人割肥肉而藏珠云, 此何愚甚也? 貴珠而賤身, 雖有珠身不存何益也? 世人皆類此, 不知貴於金珠者卽生命也. 生命從何而來也? 非以上所言諸物也, 物資也, 金寶也, 知識也, 自己等也. 當求于神前, 神卽生命之源. 神不許則不能一刻存續, 雖空鳥野花皆然, 衣金何況人乎? 吾人只知免罪于神, 只知神之事, 但潔人免人而已也. 神之所好非但此也, 有信德則有信行, 信行云者, 只禮拜禱神而已乎? 信行卽活動也. 卽有生命故也. 主行解放運動, 使人類解放于罪惡之中, 使之自由于世, 如撥雲見天, 使死人復活, 使滅國復興, 使暗世復明, 使亂世爲治世. 摩西之信, 只禮拜禱神而已乎? 엘리야 예리이 等諸先知, 皆禱神禮拜而已乎? 皆有極烈運動, 其信在上帝前確信不疑. 神之事異乎人之事, 神事中有人事, 人事中有神事. 比如種苗蒔之培之灌之, 人之事也, 花而葉而實而者, 神之事也. 故保羅曰 我與神事業之人也. 誠哉是言也, 天下萬事何事有非神而成乎? 昔有求齊者, 齊王好竽, 而有操瑟之齊門, 終身不得齊, 操瑟者自信而已, 不用齊王, 世人皆類此, 我有所信, 而皆不合神前, 故事不成, 不可主掌自信也. 人皆爲自己, 爲人亦爲自己, 勿論爲己爲人, 其信在神前, 後成功, 此何也? 爲之人也, 成之天也. 雖聖人復起, 不易此言. 此言如可不眞, 盜拓必成功, 佳仁(Cain)必成功也. 然神不許此人成功者, 其信不在神前也, 今日我之所爲, 眞耶虛耶? 保羅曰 勿爲擊空云, 擊空者無得也. 湖人有望京而行者, 卽必北行可也. 關下有望京而行者, 則必南行可也. 乃反此, 關人北行, 湖人南行, 則終不能到京矣. 猶大雖云向主, 終乃背主者, 其心乃背主故也. 今世人欲求福, 而乃背神求之, 終不可得矣. 經曰 分辨, 分辨者何也? 今日自己所行, 果眞耶假耶, 當分辨可也. 我之西乎之東乎, 昔日夸父逐日終日忙忙行走, 終不能逐者何也? 其事甚虛故也. 欲得魚則赴淵可也, 乃緣木而求之可乎? 吾人欲得福, 欲成功者, 必向主求之可也. 我所信者, 主必成之, 主必與之, 故一片丹心寧有改理也歟? 卽圃隱丹心歌, 已言之. 吾當如向日葵, 日出時向東, 日沒時向西, 勿論日在何方, 葵必向之, 主在何方我當向之. 我在密室, 必向主, 我在危險, 必向主, 我在平安, 必向主, 信心確固不拔可也. 僉位念之哉.


마음이 가는 곳을 뜻이라고 합니다. 그 뜻이 있는 곳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나의 지식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곧 마음과 뜻이 있는 곳에 편안히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각 믿어야 할 곳이 있는데, 공자는 이르기를 사람이 되어 믿음이 없다면 마치 큰 수레를 몰고 가는데 멍에 채가 없는 것 같고 작은 수레에 갈고리가 없는 것 같으니 어떻게 길을 갈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없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차를 타고 부산도 가고, 의주도 가는데 나의 마음이 먼저 차를 믿기 때문에 차를 타는 것입니다. 만일 믿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가겠습니까? 내가 만일 믿어주지 않으면 사람들도 나를 믿지 않고, 하나님도 역시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면 세계를 갈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논하는 데는 마음을 믿는 것과 덕성을 믿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마음은 내가 의지하는 바이고, 믿을 수 있는 덕성은 남이 의지하는 바입니다. 공자는 덕성에 대하여 말하고, 마음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두려움도, 무서울 것도, 의심날 것도, 유혹에 빠질 것도 없습니다. 선교사 도이명(都伊明)(C. S. Deming)은 수영을 잘 하여 그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가서 수영을 가르치는데 어린 아이가 그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물에 떴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아서 종일 동안 수영을 가르치고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다만 그 아버지의 손이 능히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는 아버지의 손을 믿고 잡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그 아이의 마음으로 하여금 누구도 상대할 수 없이 용감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힘은 큰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의 믿음은 과연 어디 있습니까? 어떤 이는 물자에 있고, 어떤 이는 지식에 있으며, 어떤 이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건축한 것이나, 왕개(王愷)나 석숭(石崇)이 천하를 가질 만큼 큰 부자였지만 이 사람들은 믿음이 물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나라가 망하고 집이 망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정복자의 발자국이 천하에 두루 남았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천하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했으나, 하루아침에 독을 탄 술 한잔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자기가 최고라고 이른 자들은 풀끝에 맺힌 이슬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옛날에 선지자가 유대인을 깨우쳐주기를 너희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며, 바벨론도 의지하지 말라하였는데 유대인의 마음은 늘 바뀌어 어떨 때는 애급을 의지하고 어떨 때는 바빌론을 의지하다가 마침내 외국에 포로가 되어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세상사는 헛된 것이므로 한 가지도 일삼을 것이 없고,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하나 이도 매우 잘 못 된 생각입니다. 돈이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나는 돈을 배척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돈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물질이 아닙니다.

얼마 전 남대문 거리에서 거지 하나가 얼어 죽었는데, 그 주머니를 뒤졌더니 1천 원이 든 저금통장이 나왔더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그 돈은 국고로 귀속되었으니, 이것을 본다면 돈이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물질 믿기를 생명의 근원으로 잘 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사람들이 믿는 바가 과연 어디 있습니까?

옛날 아테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보고 말을 걸었습니다. 선생! 당신은 무엇을 갖고 싶소? 내 무엇이든 주리다. 그 철학자가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만 한 가지 원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요? 왕이 묻자, 선생이 단호히 대답하였습니다. 왕께서 나에게 비치는 태양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것만 비켜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철학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철학자는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큰 통나무 속에서 거처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혼자서 말하기를내가 대왕이 되지 않았다면, 마땅히 저 선생처럼 되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 선생이 믿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마음속에 믿는 바가 없다면 이렇게 황제를 가벼이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광야에 거처할 때 헤롯왕이 불렀습니다. 요한이 왕의 불의를 숨김없이 직언하자, 왕은 요한을 미워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죽였습니다. 그 요한이 믿은 바는 무엇입니까? 그 마음속에는 반드시 헤롯왕보다 큰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옛날 발람 선지자는 유대와 모압의 전쟁할 때에, 모압 왕이 발람 선지자를 청하여 당신이 유대인을 저주하면 금은보화를 집안에 꽉 차도록 주겠다고 말하자, 발람의 마음이 움직여서 시키는 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저지로 가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발람의 마음은 금전보다 더 큰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실패한 것입니다. 오늘날 돈을 가지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 돈으로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자, 돈으로 교만해 진 자 들이 어찌 오래 가겠습니까?


주님께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보배는 믿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희생이 없지 않습니다. 금은보배나 지식이나 재덕 등이 공헌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며,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귀히 여기는 것을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옛 사람이 금은보화를 귀히 여겨 서역(西域)에 갔다가 돌아올 때 서역에서 보물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하니 자기의 살을 베고 구슬을 감추어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보물을 귀하게 여기고 몸을 천하게 여기니 비록 보물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몸이 없어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아서 금은보화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생명은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물건인 물자나 금은보배나 지식이나 자기 자신 등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구하여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생명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한 시각도 존속할 수 없습니다. 비록 공중에 나는 새나 들판에 피는 꽃도 다 그러하거늘 옷이나 금은이 사람에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죄를 면해 주기만 바라고 오로지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을 용서해 줄 것으로 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이것뿐만 아닙니다. 믿을 수 있는 덕을 가졌으면 믿을 수 있는 행동이 있게 되는데, 믿을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 다만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뿐이겠습니까? 믿을 수 있는 행동이란 바로 활동입니다. 바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해방운동을 실행하시어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류로 하여금 세상에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을 마치 구름을 걷어내고 하늘을 보도록 한 것 같았으며,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셨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어두운 세상을 다시 밝게 만들어 주었고, 난세를 평화로운 세계로 만들었습니다.

모세의 신앙이 다만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뿐이겠습니까? 엘리야나 엘리사 등 여러 선지자가 모두 하나님에게 예배만 했을 뿐이겠습니까? 모두 극렬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있어서 의심할 수 없이 확신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일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 중에는 사람의 일이 있고, 사람의 일 중에는 하나님이 할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식물의 씨를 뿌리어 옮겨 심고 북돋우고 물을 뿌려주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나 꽃을 피우고 잎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르기를 나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업자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옳은 말입니다. 천하만사 중에 어느 것도 하나님이 아니고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제(齊) 나라에 벼슬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나라 왕이 피리를 좋아했는데, 거문고를 가진 자가 제나라의 성문에 서서 제나라 왕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한 평생 만나지 못했습니다. 거문고를 하는 데야 자신이 있었겠지만 제나라 왕이 좋아하지 않으니 어디 쓸 데가 있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다 이와 비슷하여 아무리 소신을 가졌더라도 하나님과 맞지 않으니 일이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만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위하여 사는데 남을 위하는 것도 역시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 앞에 있어야 뒤에 성공을 합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공을 시키는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다시 살아나도 나의 이 말은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이 만일 진리가 아니라면 도척(盜拓) 같은 악인도 성공하였을 것이고, 아우를 죽인 가인도 성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성공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께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내가 하는 일이 참인가 거짓인가에 대하여 바울은 이르기를허공을 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빈 공중을 쳐보아야 아무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호남 사람이 서울을 향하여 오자면 반드시 북쪽으로 와야 합니다. 북쪽의 국경지방인 관문 아래의 사람이 서울을 향하여 오자면 반드시 남쪽을 향하여 와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국경지방 사람이 북쪽으로 가고, 호남 사람이 남쪽으로 가면 끝내 서울에 도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대인이 비록 주님을 향하여 간다고 하면서 마침내 주님을 배신한 것은 그 마음이 주님과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복을 구하려고 하면서 하나님을 등지고 구하면 끝내 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분별하라 하였는데 분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한 일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를 마땅히 분별하여야 합니다. 내가 동쪽으로 가야 하는지, 서쪽으로 가야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옛날에 과부(夸父)라는 사람이 해를 쫓아가려고 온 종일 바쁘게 달려갔으나 끝내 따라가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 일이 너무 헛되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연못에 가야하는데,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으려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복을 받고 성공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주님을 향하여 구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것을 주님께서 반드시 성공시키고 주님께서 반드시 보내 줍니다. 그러므로 일편단심 먹은 마음을 어찌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에 이미 말하였습니다.


나는 마땅히 해바라기처럼 되어야 합니다. 해가 뜰 때는 동쪽을 향하고, 해가 질 때는 서쪽을 향하며 해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해바라기는 반드시 해를 향하여 있듯이 나도 주님이 어느 방향에 있든지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밀실에 있어도 반드시 주님을 향하고, 내가 위험에 처하여 있어도 반드시 주님을 향하고, 내가 편안하여도 반드시 주님을 향하여 믿는 마음이 확고부동하여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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