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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 목사 소전 - 김진호

2013.09.27 11:52

aesan 조회 수:2720

전덕기 목사 소전 (1949년 5월)


나는 전목사(全牧師)를 안다 할 수 있어도 그 가정(家庭)은 알지 못한다. 그는 일생(一生)에 자기를 숨기고 말하지 않음으로 상동교회(尙洞敎會)에 근(近) 이십년 주재(駐在)하여 있고 교우들이 부모(父母)와 같이 사랑하건만 전목사(全牧師)의 생일(生日)을 아는 사람이 없고 다만 그의 친지(親知)들에게 들으면 그는 병자생(丙子生)이고 그의 가정(家庭)은 정동(貞洞)에 있었는데 어려서 부모(父母)를 여의고 숙부(叔父) 전성여(全成汝)에게 양육(養育)을 받았다고 한다.


전성녀씨는 枾炭商(시탄상:북창동-숯장사)으로 생활(生活)하는 중 너무 빈곤(貧困)하여 매양(每樣) 그 조카에게 교육(敎育)을 주지 못함을 유감(遺憾)으로 생각하였으나 전목사(全牧師)는 근본 총명(聰明)한 사람이라 이웃집 서당(書堂)에 가서 어깨너머로 배워 들은 것이 약간 한자(漢字)를 알게 되고 신학(神學)을 공부(工夫)한 후에는 이것저것 섭렵(涉獵)하여 상당(相當)한 지식(知識)을 수입(收入)하였다.


어릴 때에 몹시 불량(不良)하여 사람을 잘 때리고 서양인(西洋人)들이 처음으로 정동(貞洞)에 들어와 있으며 무슨 교(敎)를 전파(傳播)하매 사람들이 모여 성경(聖經)을 공부(工夫)하는데 전목사(全牧師)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기와 공부(工夫)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모욕(侮辱)을 더하기를 마지않았다.


한번은 선교사(宣敎師) 스크랜톤 의사가 조선(朝鮮)에 들어와 조선(朝鮮)정부(政府)의 지휘(指揮)로 전도(傳道)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교육(敎育)과 의료(醫療)만 허(許)하는 고로 스크랜톤 의사는 개업(開業)하고 사무원(事務員)을 구하는지라. 전성녀씨는 그 조카를 병원(病院)에 소개(紹介)하여 일을 보게 되었다.


스크랜톤 대부인(大夫人)이 전목사(全牧師)를 보고 끔찍이 사랑하여 범백(凡百)을 가르쳐 주며 특히 가정예배(家庭禮拜)를 볼 때에는 일부러 조선(朝鮮)말을 사용(使用)하여 전목사(全牧師)로 말을 알아듣게 하였다. 전목사(全牧師)는 이에 감동(感動)을 받아 차차 진리(眞理)를 배우게 되였다. 전에 돌을 던지던 일과 사람을 모욕(侮辱)하던 일을 다 뉘우쳐 고치고 양순(良順)하고 부드러운 새사람이 되었다. 전에 같이 놀던 친구들도 보고서 놀라며 하는 말이 “네가 어찌 이렇게 변(變)하였느냐” 하였다.


우리 감리교회(監理敎會)가 비로서 정부(政府)의 인가(認可)를 얻어 전도(傳道)하기 시작하여 정동(貞洞)에 제일예배당(弟一禮拜堂 )을 짓고 상동(尙洞)에 제이예배당(第二禮拜堂)을 세우고 스크랜톤 목사가 주관(主管)하는 고로 전목사(全牧師)도 스크랜톤 목사를 도와 상동(尙洞)에서 예배(禮拜)하며 그 교회(敎會)에서 권사(勸師)와 전도사(傳道師)가 되었었다.


이때의 한국(韓國)정부(政府)는 날로 부패(腐敗)하여졌다. 매관매작(賣官賣爵)하여 번군동상(煩君同上)하는 간세배(奸細輩)들이 朝權(조권:조정의 권리)을 잡고 있으며 따라서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가 간세배를 이용(利用)하여 조정(朝政)을 어지럽게 하며 점차 한국(韓國)의 이권(利權)을 잠식(蠶食)하는 때라.


민간유지(民間有志)의 발기(發起)로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만들어(참조;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 창립, 1898년 11월 4일 해산) 장소(場所)는 독립관(獨立館)으로 정하고 일주일(一週日)에 한 번씩 회원(會員)들이 모여 시사(時事)를 토론(討論)하며 시정(時政)을 풍자(諷刺)하기 시작하였다.


회원(會員)의 대부분은 기독교인(基督敎人)이 많았고 그 회(會)의 주관(主管)은 이상재(李尙在), 이승만(李承晩),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등이다. 백성들이 時政(시정)의 부패(腐敗)를 원망하던 중 이런 정치(政治)의 비평(批評)의 소리를 듣고 모두 박수갈채(拍手喝采)하며 회일(會日)이면 민중(民衆)들이 구름같이 모여 그 연설(演說)을 듣고 모두 통쾌(痛快)히 생각한다.


그 때에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일인(日人)에게 매긱(賣긱)하려는 운동(運動)이 있었다. 본회(本會)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각부(各部) 대신(大臣)을 청하여 질문(質問)하여 그런 매국(賣國)행위(行爲)를 곧 정지(停止)하라고 권고(勸告)하여 계약(契約)을 해제(解除)한 일이 있었고 그 외에 제반(諸般) 행정(行政)에 긍(亘)하여 협회(協會)에서 아는 대로 간섭(干涉)하여 그들의 비행(非行)을 규탄(糾彈)하니 이것이 시제(時霽)들이 가장 미워하는 바이요 협회(協會)를 해산(解散)하려고 고심(苦心)중이다.


그 때 전목사(全牧師)의 연설요지(演說要旨) 일부(一部)를 들면 “항해학(航海學)을 알지 못하는 자가 함장(艦長)이 되여 배를 몰고 험(險)한 바다를 건너가 배가 암초(暗礁)에 걸려 깨여지면 배 안의 사람은 그 함장(艦長)으로 인하여 다 죽고 말지라. 그와 같이 지금 대관(大官)들이 국가(國家)가 무언지 민족(民族)이 무언지 정치가(政治家) 무언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정부요로(政府要路)에 있으며 나라를 지도하니 이 나라는 필경 암초(暗礁)에 걸린 배와 같이 깨어질지라. 이 나라의 목숨을 담은 우리 민족(民族)은 다 멸망(滅亡)코 말지니 이 일이 답답하지 않으냐”고 외치니 장내(場內)는 우뢰가 움직이는 것처럼 박수갈채(拍手喝采)하였다.


그 후에 협회(協會)는 필경 정부(政府)고관(高官)들의 시기로 부상패장(負商牌長장사꾼) 길영수(吉泳洙)를 시켜 협회(協會)를 습격(襲擊)하여 다시 모이지 못하게 되고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양씨(兩氏)는 피검(被檢)되고 이여(爾餘나머지 사람)는 도외(逃外)하고 이여(爾餘)는 전목사(全牧師)를 따라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로 몰켜 들어왔다.

우리나라 독립(獨立)이란 말이 독립협회(獨立協會)로부터 생겼고 그 정신(精神)은 상동(尙洞)에서 함양(涵養)되었다. 이때에 전목사(全牧師)는 비로서 목사안수(牧師按手)를 받고(1907년 33살 때) 상동교회(尙洞敎會)를 담임(擔任)하였고 동시(同時)에 청년회장(靑年會長)이 되었다.


청년회(靑年會)에는 매주(每週) 목요일 하오 7시에 집회(集會)하여 잠깐 예배(禮拜)와 기도(祈禱)를 봉(奉)하고 시사논평(時事論評)이 있었다. 독립협회(獨立協會) 때와 다름없이 가장 격렬(激烈)한 풍자(諷刺)와 비평(批評)이 있었다.


그 때에 시사(時事)가 점점 글러지고 대관(大官)들의 비행(非行)은 모두 매국행위(賣國行爲)에 지나지 못함으로 도처(到處)에 민심(民心)이 분사(憤査)하여 수습(收拾)이 어려울 때라. 회(會)의 간부(幹部) 몇 사람이 상동교회(尙洞敎會)의 지하실(地下室)에 따로 모여 결사구국(決死救國)을 목적하고 무형(無形)한 회(會)를 조직(組織)하니 곧 신민회(新民會)이다.


간부(幹部)로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양기탁(梁起鐸)씨 등이고 신민(新民)은 비밀(秘密)에 속(屬)하고 회(會)로는 청년회(靑年會)가 있고 기관지(機關紙)로는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있고 교육(敎育)으로는 청년학원(靑年學院)이 있었다. 신민(新民)이 비록 무형(無形) 무명(無名)에 속(屬)하였으나 그 정신(精神)은 해내(海內), 해외(海外)로 파급(波及)이 민속(敏速)하여 신민(新民)의 말을 한번 들은 사람은 죽음을 아끼지 않고 달겨 들어 부탕(赴湯뜨거운물)염화(焰火)라도 사양치 않을 만큼 석화전광적(石火電光的)으로 신속(迅速)하였다.


이에 대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큰 역할(役割)을 하였고 그 외에는 안창호(安昌浩)선생의 열렬(熱烈)한 변설(辯說)과 기타(其他) 회원(會員)들의 선전(扇傳)으로 불같이 일어났다. 모두 지하(地下)로 되었고 표면(表面)으로는 죽은 듯이 아무 힘이 없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일인(日人)들이 상동(尙洞)을 주목(注目)하여 청년회(靑年會)를 없이 하려고 백방(百方)으로 운동(運動)하였고 선교사(宣敎師)들을 보고 청년회(靑年會)를 해산(解散)하라고 권(勸)하여도 듣지 않으니 직접(直接) 고종황제(高宗皇帝)께 아뢰어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가 나라에 불온(不穩)한 단체(團體)라 하여 해산(解散)을 청(請)하였다.

그 때에 시제(時宰)들은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미워하던 마음이 또 청년회(靑年會)를 미워하여 칙령(勅令)으로 해산(解散)을 명(命)하였다. 망국근성(亡國根性)을 가진 소위(所謂) 대관(大官)들은 한 사람도 차(此)를 반대(反對)하는 자(者)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일인순사(日人巡査)가 교회(敎會)안에 함부로 들어와 검거(檢擧)에 착수(着手)하니 교회(敎會)를 의지(依支)하고 있던 이동녕(李東寧)은 만주(滿洲)로 들어가고 이회영(李會榮)도 같이 입만(入滿)하였다.


전목사(全牧師)도 병(病)으로 오랫동안 신음(呻吟)하는 고로 지방(地方)의 연락사무(聯絡事務)를 나에게 위임(委任)하여 나는 힘 있는 대로 출력(出力)하여 도와주었고 병중(病中)이라고 기동(起動)할 수만 있으면 회원(會員)들을 격려(激勵)하는 것과 활동(活動)하는 방법(方法)을 친(親)히 지도(指導)하였고 어느 때는 병상(病床) 옆에 있는 나를 부르며 “형(兄)님 어찌하면 좋으오. 동지(同志)들이 다 흩어졌으니 이 곳에 남은 자는 우리 둘뿐이니 우리는 사력(死力)을 다하여 신민정신(新民精神)을 지켜야지요” 한다.


그러자 마침 어느 시골목사가 와서 하는 말이 “오늘 배재광장(培材廣場)에서 일본목사(日本牧師) 평암(平岩)의 연설(演說)이 있었는데 조선교회(朝鮮敎會)와 일본교회(日本敎會)가 합동연회(合同年會)를 보자 하니 종교(宗敎)에 어디 원수(寃讐)가 있오. 형님 생각은 어떠시요.”하니 전목사(全牧師)는 별안간 소리를 높여 대답(對答)하되 “목사양심(牧師良心)에서 나온 소리요. 양심(良心)에 허락(許諾)하거든 행하시요”라고 말하였다. 그 후로는 그 목사(牧師)는 다시 전목사(全牧師) 앞에 오지 못하였다.


정의(正義)에 대(對)하여 절대성(絶對性)을 가진 전목사(全牧師)는 그런 간세배(奸細輩)를 일절(一切) 용납(容納)치 않았고 또 한번은 어느 선생(先生)이 찾아와서 말하되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물질(物質)이 필요(必要)하니 내가 수만(數萬)여원을 변통(變通)할 터이니 사용(使用)하시요”한다. 전목사(全牧師)는 묻되 “선생(先生)이 무슨 돈이 있오. 필경 어느 곳에서 얻어 오려는지 자세히 말씀하시요”하자 그는 답(答)하되 “송병준(宋秉晙)이라”한다. 전목사(全牧師)는 손을 흔들며 “역적(逆賊)의 돈을 얻어 나라를 구원한다는 일은 할 수 없오”.


지방(地方)에 있는 동지(同志) 연락(聯絡)과 내왕(來往)에 물질(物質)이 있어야 할 때는 자기가 동대서취(東貸西取)하여 **(사용)하느라고 그 숙부(叔父)의 소유(所有)인 가옥(家屋)까지 전집차용(典집借用)하였다. 그 가옥(家屋)을 잡힐 때 돈 삼백원을 차용(借用)하였는데 집에 와서 돈을 헤어보니 돈이 삼백 오십원이다. 그 즉시(卽時)로 돈 오십원을 가지고 전포주(典鋪主)에게 주고 이유(理由)를 설명(說明)하니 전주(典主)는 너무 감사(感謝)하였다.


상동(尙洞)를 중심(中心)하고 각처(各處)에 지교회(支敎會)를 설립(設立)하고 전도(傳道)하였는데 공덕리(孔德里), 새남터, 궁정동(宮井洞), 창의문외(彰義門外) 등지이다.


그의 설교(說敎)는 평범(平凡)하여 알아듣기 쉽고도 격려(激勵)가 심(甚)하였다. “주를 믿으면 참으로 믿고 나라를 사랑하거든 참으로 사랑하라”하니 그의 설교(說敎)에 정신(精神)이다. 일측(日側)의 정탐(偵探)으로 다니던 자(者)들도 와서 그 설교(說敎)를 듣고 자기 실정(實情)을 자복(自伏)하고 용서(容恕)를 청(請)하는 자(者)도 있었다.


자기 손으로 설립(設立)한 학교(學校) 곧 청년학원(靑年學院)과 공옥학교(攻玉學校)에 일어(日語)를 한 과목 넣어 가르치라고 권(勸)하는 자(者)가 있어도 전목사(全牧師)는 듣지 않았다. 전목사(全牧師)와 운명(運命)을 같이하던 청년학원(靑年學院)은 근본 청년회(靑年會)에 발기(發起)로 된 것이요 독립정신(獨立精神)을 양성(養成)하던 최초(最初)의 기관(機關)이다.


미국(美國)에 사는 하와이 동포 강천명(姜天明)이란 청년(靑年)이 미화(美貨) 4원을 보내어 조선청년(朝鮮靑年)을 교육(敎育)하여 달라는 부탁(付託)을 받은 청년회(靑年會)에서 이 학원(學院)을 설립(設立)하고 조선청년(朝鮮靑年)들에게 독립 정신(獨立精神)을 함양(涵養)하던 유일(唯一)의 기관(機關)이다. 교원(敎員)들은 무보수(無報酬)로 교수(敎授)하였고 주시경(周時俓)씨는 조선말을 중심(中心)하고, 유일선(柳一宣)씨는 수학(數學)을 중심(中心)하여 4회의 졸업생(卒業生)을 내게 되었다.


고종황제(高宗皇帝)는 들으시고 학원(學院)의 건물(建物)이 없음을 통촉(通燭)하시고 단성사(團成社) 건물(建物)을 하사(下賜)하시겠다는 처분(處分)이 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청년회(靑年會)에서 생각하기는 “황송(惶悚)하지만 우리가 상동(尙洞)을 떠날 수가 없고 하사(下賜)를 받을 것이 없이 우리 힘으로 유지하여 보자”하고 하사(下賜)를 받지 않았다. 그 때 시제(時帝)들이 우리 청년회(靑年會)를 방해(妨害)하던 중 만일에 하사(下賜)를 받으면 다소 그 간섭을 받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의심도 있어 받지 않았다.


이때에 조선(朝鮮)에 개발회사(開發會社)라는 것이 있어 이들의 소개로 조선동포 1014인이 멕시코에 들어가 노동하는 중 그 고생(苦生)은 말할 수 없이 비참(悲慘)하였다. 소위(所謂) 집정자(執政者)는 개발회사(開發會社)가 무엇 하는 곳인지 자기 민족이 외국으로 팔려가도 심상시 하고 있으며 민족을 구원하자는 무슨 토의(討議)가 있으면 이것을 곧 박멸(撲滅)하는 자들이다.


전목사(全牧師)는 회(會)에 발론(發論)하기를 우리가 멕시코에 사람을 파송(派送)하여 우리 동포 1014인을 데려오자고 발론(發論)하였더니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가결(可決)되어 즉석(卽席)에서 수금(收金)하여 여비(旅費)를 만들고 그 이튿날 박용만(朴容萬) 외에 삼인을 위원(委員)으로 정(定)하여 출발(出發)하게 하였다.


전목사(全牧師)가 남대문 안에 볼 일이 있어 나아갔더니 어느 청년(靑年)들이 따라오며 “멕시코 여비를 드립니다”하고 금품(金品)을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인격(人格)과 덕격(德格)이 사람을 감화(感化)하여 애국(愛國)의 길로 인도함은 오직 조선목사(朝鮮牧師)중 한사람이다. 그는 물루(物累돈을 걷는데)에 뛰어나고 정의(正義)를 목표(目標)하는 위인(偉人)이다.


그의 가장 좋아하는 글은 성경(聖經)과 역사(歷史)이다. 그의 서재(書齋)에서 혼자 있거나 사람과 같이 있을 적에 가끔 음읍(飮泣울음)을 금(禁)치 못함은 어찌하면 이 민족(民族)을 구원할까 함이다. 학원경비(學院經費)를 염출(염出)하기와 교사(敎師) 연용(延用채용)이 심히 어려웠으나 모두 다 그 성의(誠意)에 감화(感化)하여 도와주었고 특(特)히 우당(友堂) 이회영선생(李會榮先生)이 직접간접(直接間接) 노력(努力)이 많았고 또 학원생도(學院生徒)들이 무슨 웅변집(雄辯集)을 인쇄판매(印刷販賣)하니 일경(日警)에 탐지(探知)되여(나누워 준것이) 수다학생(數多學生)이 검거(檢擧)되었다.


그 후로 학원(學院)이 주목(注目)이 욱심(旭甚)하고 또 전목사(全牧師)는 병세(病勢)가 위중(危重)하여 학원(學院)에 출력(出力)이 곤란(困難)하게 되었다(경비를 댈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학원(學院)은 한 옆으로 핍박(逼迫)이 심(甚)하고 한 옆으로 유지 곤란(困難)으로 폐지(廢止)가 되었다.

“오호(嗚呼)라! 학원(學院)이 없어지는 것이 곧 나라 없어지는 것이라” 하여 교사(敎師) 생도(生徒)들은 모두 통곡해산(痛哭解散)하였고 그 후 일 년이 지난 1914년 3월 23일에 전목사(全牧師)는 필경(畢竟) 상동목사관(尙洞牧師館)에서 별세(別世)하시니 원근(遠近)에서 듣고 다 통석(痛惜)하여 마지않으며 중국신문(中國新聞)에는 종교위인(宗敎偉人) 서거(逝去)라 제(題)하고 그의 약사(略史)를 기록(記錄)하였다.


전목사(全牧師)가 떠난 후라도 나는 오히려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남어 있으며 잔무(殘務)를 처리(處理)하고 후임목사(後任牧師)를 도와주었다. 사람이 떠난 후에는 결점(缺點)을 발견(發見)할 수 있는데 전목사(全牧師)에 대하여서는 갈수록 유애(遺愛)가 깊었다.


여러 해 중병(重病)에 있으므로 교회(敎會)일을 살피지 못한 고로 병석(病席)을 타처(他處)로 옮기려 할 때 직원(職員)과 교우(敎友)들이 한사코 “우리 목사(牧師)님은 타처(他處)로 옮기지 못합니다. 시체(屍體)라도 우리가 모시겠는데 하물며 살아서 어디고 가신단 말이요” 하고 막는 고로 떠나실 때까지 생활비(生活費)를 지불(支拂)하고 또 치료비(治療費)까지도 담당(擔當)한 적이 있었고 목사관(牧師館)을 떠나게 되었으니 교우(敎友)들이 모두 통곡(痛哭)하느니라. 이렇듯 유애(遺愛)가 깊었다. 임종 시(臨終時)에는 교우(敎友)들이 밤을 새워 가며 구명기도(救命祈禱)를 올렸다.


그의 두 가지 절대성(絶對性)을 고칠 수 없다(성격). 하나는 반종교자(叛宗敎者)요 둘째는 반민족사(叛民族者)니 이 종류(種類)의 사람은 용서(容恕)없이 질책(叱責)을 가(加)하여 회개(悔改)를 촉(促)하고 불능(不能)이면 거절(拒絶)하였다. 고로 전목사(全牧師) 생존(生存)하여 있는 동안에 그런 불의(不義)한 도배(徒輩)가 상동(尙洞) 에 오지 못하였다.


그의 부인 조(趙)위늬씨에게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長)은 전진택(全鎭宅), 차(次)는 전진원(全鎭垣)이요, 삼(參)은 전진수(全鎭洙)인데 다 배재중학(培材中學)을 졸업(卒業)하였고 전진택(全鎭宅)은 전목사(全牧師) 별세(別世) 후에 감독(監督) 헤리스씨를 따라 미국(美國)으로 유학(留學)의 길을 떠났다.


미령(美領미국영토) 포화도(布화島하와이)에 상륙(上陸)하니 전목사(全牧師)의 친구들이 진택군을 환영(歡迎)하고 조선총독(朝鮮總督)의 악랄(惡辣)한 정치(政治)를 장문논설(長文論說)로 신문(新聞)에 게재(揭載)하여 일경(日警)들이 진택군의 경성본가(京城本家)에 와서 가택(家宅)을 수색(搜索)하였고 해리스씨는 진택을 돌아보지 않았다. 진원(鎭垣)군은 지금 공옥학교(功玉學校) 교원(敎員)으로 있고 진수(鎭洙)군은 수년 전에 사망(死亡)하였다.


전목사(全牧師)가 병자생(丙子生)이라면 계유생(癸酉生)인 나에 비(比)하여 삼년이 적다. 전목사(全牧師)와 같이 고생(苦生)하던 이승만박사(李承晩博士), 김구선생(金九先生)이 다시 돌아와 나라를 건설(建設)하였는데 전목사(全牧師)는 어찌하여 오지 못하고 먼저 세상(世上)을 떠났는고.


이실난감(理實難감) 1949년 5월 11일 죽지 않고 살아있는 쓸데없는 친구 김진호 기록 77노물(老物)


* 참고

김진호 목사의 '병중쇄록'중에서 김희영(金喜永)씨의 고증 (김진호 목사의 셋째 아들) “세째 아들 진수는 나와 같이 배재에서 공부하였고, 전목사는 처음에 고문에 병이 들었으나 나중에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진수군도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부는 전목사가 병환 중에 있을 때 전목사와 침식을 같이하며 내내 병간호를 하였다. 그리고 전목사 부인 조씨는 전목사 사망 후 다른 곳으로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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